=====지난 칼럼=====/이미배의 Music Story

[Films on Musicians] 글렌 굴드, 끝나지 않은 신화 (Genius Within: The Inner Life of Glenn Gould)

뉴욕에 출장 온 영화감독 친구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관한 영화가 개봉중이라며 함께 보러가자고 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지인들이 글렌 굴드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에 반해 클래식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던 터였지만난 사실 글렌 굴드의 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선은 그의 음악을 들으면 테크닉적인 면모가 너무 완벽하다 못해, 마치 기계가 치는 소리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천재 예술가' 끊임없이 찬양되는 것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못마땅 했던 것 같다.

영화의 제목이
 Genius Within 이라니 (한국에서는 "글렌 굴드, 끝나지 않은 신화"라는 제목으로 부천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어떤 또 다른 천재 신화를 펼쳐놓으려나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다큐멘타리 영화'라니, 뭐 감동까지는 아니라도 얻는 것(정보나 지식?)이 있겠거니하는 기대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Genius Within, 영화 포스터


자막이 없는 영화를 보게 될 테니, 자세한 내용을 못 알아들을 수도 있을 듯 하여 영화를 보러가기에 앞서 글렌 굴드에 관해 약간의 인터넷  조사를 했다.
"1932년 캐나타 토론토에서 태어나, 바흐의 건반음악 연주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 리스트, 쇼팽, 슈만 등 19세기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들보다는 바흐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그리고 쇤베르크의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고, 무엇보다 다양한 기행(奇行)으로 유명했으며, 31살때부터 콘서트 무대에 서지 않고 스튜디오 레코딩과 다른 작업들(작곡, 글쓰기, 지휘, 방송활동 등)에 열중했었다. 50살을 넘게 산다면 피아노를 그만 두고 지휘와 다른 활동에 열중하겠다고 했었으나, 1983, 50세가 되던 해에 두통을 호소하던 후 쓰려졌고, 왼쪽 몸이 마비된 이후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사망." (영문 wiki사전 요약)


사실 글렌 굴드의 생애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 가장 유명한 건, <글렌 굴드에 관한 32개의 짧은 영화> (François Girard 감독, 1993년 작)이지만, 그의 생애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영상물은 이렇게나(http://www.fandango.com/glenngould/filmography/p280904) 많이 나와 있었다전작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니감독들(피터 레이몽 Peter Raymont, 미셸 호제 Michèle Hozer)은 무언가 꼭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듯 하다


 

<영화 Glenn Gould: Genius Within의 트레일러>


영화는 글렌 굴드가
 살았던 캐나다 토론토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비추며 시작된다. "음악가라는 존재의 이유을 말하자면, 음악을 '다르게' 연주해야 하는 것이라 믿는다."라는 의미심장한 내래이션과 함께

이야기는 굴드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 그의 가장 친했던 동네 친구토론토 왕립음악원 시절(굴드는 12살에 입학) 당시 같은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웠던 동료 누나(^^), 동시대 활동했던 피아니스트 아쉬케나지, 그가 20대에 사랑했던 여인, 그의 사진을 찍었던 사진사, 함께 방송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엔지니어, 40대에 사랑했던 여인(작곡가/지휘자였던 Lukas Foss의 아내)과 이제는 장성한 그녀의 자녀들의 인터뷰들로 구성이 된다. 여기에 '굴드 학자'로 자막이 붙여진 음악학자의 인터뷰까지 덧붙여지면서한 인생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영화 속에 펼쳐졌다.

기존에
 이미 공개된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상물들이 많은 부분 활용되고 있지만, 이 영화를 각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이런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였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다는 피아노 건반의 높이보다 훨씬 낮은 의자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무엇에 홀린 듯 온 몸을 휘져으며, 여기에 기괴한 허밍까지 덧붙여가며 피아노를 치는 모습, 연주장 밖에서는 줄곧 베레모에 롱코트를 입고 손에는 늘 털장갑을 끼고 다니는 그의 모습이, 이젠 고독하고 기이한 예술가의 아이콘이라 할 만큼 익숙하기까지 하지만, 이렇게 잘 알려진 겉모습 이면의 삶이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뉴욕에서의 데뷔
, 큰 논란을 일으켰던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필과의 브람스 협주곡 1번 협연, 냉전시대 모스크바에서의 바흐 연주 등 피아니스로서의 활동 중에 있었던 큼직한 사건들, 콘서트 무대를 떠난 후방송 활동과 레코딩, 작곡가, 저술가, 혹은 '전방위 종합 예술가'로 해냈던 다양한 활동들이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천재'가 아닌, 예술가로 살고자 한 '한 인간' 글렌 굴드의 모습이 드러났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 방송활동에서 알게 된 스튜디오 엔지니어(이름은 기억할 수 없다. 이름 자막이 인물이 처음 등장할 때 한 번 씩 밖에 나오지 않아서 난감)와의 우정--우정이라기 보다는 형제애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함께 수 많은 밤샘작업을 통해 꼼꼼하게 레코딩 편집 작업을 하면서 두 사람은 형제 이상의 우정을 나누었고, 굴드는 법적으로도 둘이 형제가 되기를 원했지만, 이 엔지니어가 이미 형제가 많았던 이유로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 작곡가/지휘자 루카스 포스 부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다소 길다고 느껴질만큼 전체 인터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여인과, 그녀의 아이들과 캐나다에서 보낸 몇년 간의 시간 동안 굴드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고, 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결국 그 사랑의 끝은 포스 부인에 의한 결별로 마무리되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들 끝에
, 말년에 북극으로 가서 저술작업을 하고한 농장에서 동물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는 굴드의 모습에서 (굴드는 "이 순간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일생을 거쳐, 다양한 우정, 사랑을 느꼈지만 결국은 그러한 인간관계 속에서 받은 영혼의 상처들이 느껴졌다이 장면에서 그저 아이들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했던 맑은 영혼의 굴드가 드러나면서기이한 천재의 모습보다는세상과 소통하고자 했으나 (그 방식이 너무나 앞서가서) 지극히 고독할 수 밖에 없었던 한 예술가의 삶이 보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굴드의 젊은 시절, 집에서 개와 함께 찍은 사진


물론, 영화가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천재'로서의 징후들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감독들은천재의 신화를 강조하기 보다는, 굴드라는 한 예술가의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이런 이유로, 영화를 보고 나서굴드의 삶에 감정이입이 되어 그 고독했던 삶에 가슴이 아려오기까지....
세상에 '예술가'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 아니, 그렇게 거창하게 이름붙이지 않더라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혹은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많은 외로운 이들에게 굴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음악을 통해 위로를 건넨다. 당신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 수천명이 운집했던 굴드의 장례식에서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영화의 앞 부분, 그만의 골드베르크로 태어났으니 '굴드베르크'라고 불러야 한다는 친구의 인터뷰에 공감)이 연주되는 순간, 가족도 아니고 지인도 아닌, 많은 이들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죽음에 대한 애도라기 보다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속에서 느껴지는고독한 인생을 살았던 한 예술가의 삶에 대한 찬사처럼 느껴졌다.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


'
다큐멘터리'니까 최소한 지식이나 정보라도 얻어가겠지 했던 기대를 훨씬 넘어서, 감동까지 전해주는 영화였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영화음악이 전부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로 구성되어있다는 것.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만 르네상스시대 성악음악이 깔렸는데글렌 굴드가 지휘한 음악일 지도 모르겠다.) 
영화 감독들이 직접 음악까지 각본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각 장면, 화면에 참으로 적절하게 입혀진 음악이었다. 음악에 대한 식견과 센스가 상당히 있어보이는 선곡들음악을 듣는 것 만으로도 '영화 보러오길 참 잘했구나~' 하는 만족감을 주었다.  

내가 아는 가장
"예술가"스러운 나의 영화감독 친구와음악학계에 벽돌 한 장 쌓아올리겠다는 심정으로 논문을 쥐어짜내고 있는 나 모두, 글렌 굴드의 고독한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서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글렌 굴드의 팬들에게는 더 없이 궁금한 영화일 것이고, 그의 팬이 아닌 사람에게도 영화 자체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at Quad Cinema in New York
9/16/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