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걸그룹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

최근 걸그룹 씨스타가 마지막 곡을 발표하고 그룹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걸그룹 전성기’를 열었던 원더걸스, 카라, 투애니원, 포미닛 등이 이미 줄줄이 해체한 뒤다. 아직 소녀시대가 있긴 하지만, 핵심 멤버 제시카가 탈퇴 이후 개인활동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2세대 걸그룹’ 시대가 저문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해체는 예의 아이돌의 ‘7년차 징크스’를 또 한번 확인시켜준다. ‘7년차 징크스’란 공정거래위원회가 기획사의 아이돌 착취를 막기 위해 마련한 표준계약서의 최대 계약 기간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부분의 아이돌그룹이 이 기간 종료 뒤 재계약 장벽을 넘지 못하고 완전체 활동을 종료하게 된다. 특히 이 장벽은 걸그룹에게 유독 더 높게 다가온다. 외모, 나이, 인성 등 모든 면에서 보이그룹보다 엄격한 잣대를 요구받는 걸그룹은 그만큼 수명도 짧을 수밖에 없다.

 

KBS가 제작한 웹예능 <아이돌드라마 공작단>의 출연 인물들.

2세대 걸그룹의 퇴장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뒤를 이을 3세대 걸그룹 콘텐츠의 상대적 협소함 때문이다. S.E.S와 핑클 등 소위 ‘국민요정’으로 소비된 1세대 걸그룹에 뒤이어 등장한 2세대 그룹들은 전보다 다양한 개성과 무대로 이른바 ‘걸그룹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옆집 소녀 같은 친근한 이미지로 세대 초월 신드롬을 일으킨 원더걸스, 완벽한 군무와 보컬을 선보인 ‘걸그룹의 정석’ 소녀시대, 당당하고 파워풀한 퍼포먼스의 투애니원, ‘큐트섹시’ 카라 등 다채로운 끼와 매력으로 무장한 2세대 걸그룹은 제2의 한류를 이끌어내며 K팝의 위상을 높인 주역이다.

 

이에 비해 트와이스, 여자친구, 러블리즈, 오마이걸, 우주소녀 등 ‘3세대 걸그룹’은 주로 귀엽고 미성숙한 소녀 이미지에 갇혀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들의 무대나 뮤직비디오에는 일본식의 짧은 교복 치마와 핫팬츠인 부르마 체육복, 테니스 스커트 등 롤리타콤플렉스 혐의를 받는 의상이 단골 출연하고, 애교 섞인 몸짓이 포인트 안무로 강조된다. 이러한 경향은 얼마 전 아기 턱받이 의상을 착용하고 ‘어른이 된다면’이라는 곡을 부른 신인 걸그룹 보너스베이비의 무대에서 절정을 이뤘다. 점점 수동적이고 유아적으로 뒷걸음질하는 걸그룹 무대의 다른 한편에서는 Mnet <프로듀스 101>, JTBC <잘 먹는 소녀들>, KBS <본분 올림픽> 등 가학성을 극대화한 걸그룹 예능 프로그램들이 속속 방영되었다. 

 

이처럼 걸그룹 콘텐츠의 퇴행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얼마 전 주목할 만한 두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SBSfunE 채널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아이돌마스터.KR- 꿈을 드림>(이하 <꿈을 드림>)과 KBS에서 제작한 웹예능 <아이돌드라마 공작단>이다. 일본의 유명 아이돌 육성 게임을 원작으로 한 전자에서는 실제 오디션으로 선발된 걸그룹 ‘리얼걸 프로젝트’가 직접 성장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후자에서는 여러 걸그룹의 멤버들이 모여 직접 대본을 쓰고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이 프로그램들은 공통적으로 드라마에서 새로운 콘텐츠의 가능성을 찾았다. 단편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무대나 예능 프로그램보다 좀 더 길고 안정적인 서사 안에서 걸그룹의 자의식적 목소리가 진지하게 드러난다.

 

먼저 <꿈을 드림>은 제목처럼 소녀들의 꿈과 성장을 강조한 ‘청춘 힐링 드라마’를 표방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걸그룹 멤버였으나 교통사고로 비운의 죽음을 맞은 쌍둥이 동생을 대신해 숨겨왔던 꿈과 재능을 자각하는 수지(이수지),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을 꿈꿨지만 번번이 오디션에서 좌절하는 최장수 연습생 영주(허영주), 계층 이동 사다리가 끊어진 시대에 유일한 신분상승 수단이 된 아이돌에 목숨 거는 흙수저 출신 지슬(차지슬) 등 걸그룹 이전에 평범한 청춘으로서의 고민이 성장드라마에 함께 녹아든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순정만화 같은 분위기와 아이돌 육성 게임 원작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자기 고민이 담긴 소녀들의 담담한 내레이션을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희귀하고 유의미한 경험이다.

 

‘본격 아이돌 자서전 드라마’를 목표로 한 <아이돌드라마 공작단>은 더 인상적이다. <프로듀스 101>에서 선발된 IOI 출신 전소민, 역시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김소희, 마마무의 은별, 레드벨벳의 슬기, 러블리즈의 수정, 오마이걸의 유아, 소나무의 디애나 등 여러 걸그룹에서 모인 7명이 주인공이다. 첫 회에서 이들은 한 드라마 오디션 현장에서 평가받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남성 심사위원들이 요구하는 그대로 연기와 개인기를 선보여야 하는 오디션 장면은 걸그룹의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제작진 눈에 들지 못하고 모두 탈락한 멤버들은 “오디션에 붙을 수 없다면 우리가 직접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2회는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걸그룹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는 내용이다. 휴대폰 금지, 다이어트 강요, CCTV 감시 등 인권 착취 상황의 고발을 통해 소녀들은 자연스럽게 연대의 공동체를 구축한다. 그리하여 프로그램은 금기와 억압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 소녀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발언권을 축소당한 여성 전통 안에서 자전적 서사가 지니는 의미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시도만으로도 분명 인상적이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에서 과연 두 프로그램이 단순히 시도를 넘어 걸그룹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