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막장드라마도 탄핵감이다

-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게이트가 불거졌을 때 모두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 사건을 막장드라마에 비유했다. 사이비, 비아그라, 호스트바, 치정, 약물중독 등 사건 관련 단어의 저급함만 봐도 기존의 게이트와는 차원이 달랐으니 그럴 만하다. 오죽하면 한국식 막장드라마에 익숙한 일본에서도 이 사건을 인물관계도까지 그려 소개하며 ‘막장 한류드라마’라는 조롱을 서슴지 않았다. 국정농단 사건과 막장드라마가 닮은꼴인 건 단지 자극적인 키워드 때문만이 아니다. 그 이면에 깔린 핵심 속성, 즉 사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골적 탐욕이야말로 더 본질적인 공통점이다. 그런 면에서 두 막장드라마는 물질적 가치에 다른 모든 가치가 종속된 괴물 같은 이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SBS가 방영 중인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의 포스터(왼쪽 사진)와 김 작가의 전작 <내 딸, 금사월>의 한 장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핵심 인물들에 대한 심판이 진행 중인 국정농단 게이트처럼, TV 시청률의 제왕인 막장드라마 또한 쇠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사례 하나를 막장드라마의 새로운 대모로 불리는 김순옥 작가의 최신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SBS에서 방영 중인 토요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는 제작발표회 때부터 ‘김순옥 작가의 종합선물세트’로 떠들썩하게 홍보됐다. 김순옥은 막장드라마 흥행의 핵심인 자극적 갈등의 동시다발적 진행을 가장 역동적이고 속도감 있게 그려내는 작가다. 이번 신작에서는 출생의 비밀, 신데렐라 스토리, 불륜, 재벌가의 암투, 복수 등 막장드라마의 필수 요소들을 겹겹이 쌓아올려 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가령 김순옥표 복수극은 여주인공 세 명의 삼중 복수극으로 확대됐고, 갈등을 견인할 김순옥표 악녀도 투톱으로 배치됐다. 오프닝만 봐도 얼마나 ‘센’ 드라마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시작은 결혼식 장면이다. 신부 강하리(김주현)가 직접 축가를 부르며 파격적으로 등장한 예식이 끝나고 신혼부부는 친구에게서 빌린 웨딩카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갑자기 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고 순식간에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장면이 바뀌자 이번엔 화재 현장이다. 화마에 휩싸인 건물 안에서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고, 밖에선 엄마 김은형(오윤아)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치고 있다. 장면은 또다시 바뀐다. 한 건물 옥상이다. 왕년의 스타배우 민들레(장서희)가 스토커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른다. 각각의 사건 현장으로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가 출동한다. 그리고 그 구조차들이 한 고속도로에 모였을 때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여자 양달희(다솜)가 나타난다. 미친 듯이 폭주하던 그녀는 순식간에 4중 추돌사고를 일으키고 구조차들은 모조리 전복되고 만다. 구조를 기다리던 이들은 결국 동시에 사망한다. 이 모든 사건이 드라마 시작 3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종합선물세트’라던 제작진 말대로 자극성과 속도감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유불급이다. 수많은 막장드라마를 통해 올라갈 대로 올라간 자극의 역치에 둔감해진 탓에 웬만한 설정은 더 이상 흥미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미적지근하다. 온갖 자극적 설정을 고밀도로 채워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김순옥 흥행신화의 시작인 <아내의 유혹> 주역이자 ‘막장드라마의 치트키’라 찬양받는 장서희를 주연배우 중 한 명으로 소환했음에도 그렇다. 고장난 브레이크와 질주하는 자동차, 4중 추돌사고가 낳은 참혹한 현장은 이제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 한계를 모르고 폭주하던 막장드라마 자체가 맞이한 재난 상황의 은유처럼 보인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김순옥의 전작인 MBC <내 딸 금사월>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희대의 악녀 연민정 신드롬으로 화제를 모았던 MBC <왔다 장보리> 이후 내놓은 차기작이다. 여기에서 김순옥은 모녀 2대에 걸친 이중 복수극으로 자극의 역치를 한껏 높여 안정된 시청률은 확보했으나 전작만큼의 흥행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몇 회 걸러 폭발사고가 발생하고 인물들이 동반추락하며 충격효과를 노렸음에도 돌아온 건 사상 초유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세 차례 제재라는 불명예뿐이었다. 그리고 김순옥의 전작을 모두 합친 듯한 <언니는 살아있다>는 말하자면 최후의 ‘올인’ 승부수지만 역시 기대 이하의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막장드라마 쇠퇴의 징후는 이 밖에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김순옥에 앞서 막장드라마의 원조 대모 중 한 명이었던 임성한이 ‘임성한월드의 종합선물세트’임을 선언했던 MBC <압구정 백야>의 신통찮은 반응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것은 이미 상징적인 사례다. 또 다른 막장드라마의 원조 대모 문영남 작가의 최근작 <우리 갑순이> 역시 방송 사상 최초로 데이트 폭력 문제로 방송통신심의 대상에 오른 작품이라는 불명예 기록만 남긴 채 저조한 반응 속에 종영됐다.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를 방영한 SBS는 시청률 침체가 계속되자 결국 주말극을 폐지하고 토요드라마로 편성전략을 바꿨으며 또 하나의 막장드라마 시간대인 저녁일일극 폐지를 결정했다. 이 가운데 막장드라마의 근본적 원인인 시청률 지상주의와 수익 극대화의 제작 풍토가 만들어낸 고 이한빛 PD의 비극은 가장 확실한 비상 사이렌 소리다. 막장드라마의 폐해는 임계점에 이르렀다. 그 경고음마저 멈추기 전에 막장드라마는 탄핵당해야 한다.

 

김선영 TV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