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김장김치 처리법

예전에 늦봄이면 엄마는 만두를 빚었다. 추운 이북에서는 김장김치를 덜어내어 만두를 빚어 삶은 후 처마에 매달아 얼렸다고 한다. 겨우내 맛있는 만두를 늘 먹을 수 있었겠다.

이남에서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는지, 김치가 시어지면 비로소 만두 만들 요량을 했다.

먼저 양념을 좀 털어낸다. 만두 맛은 담백해야 하는데, 진한 양념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두부와 당면도 준비한다. 김치를 송송 썰고 비계 많은 돼지고기도 다져 넣는다. 특히 비계가 중요하다. 만두의 진한 맛은 비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요즘은 일부러 달라고 하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운 게 비계다. 예전에 정육점 심부름을 갈 때 엄마의 당부는 이랬다. “비계 없는 부위로 달라 그래라.” 그러면 나는 푸주한 아저씨가 비계를 제대로 잘라내는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했다.

물론 비계 안 끼워서 팔면 뭐가 남았겠는가. 붉은 살점 옆 두툼한 비계를 보고 엄마는 한마디 하셨다. “정육점도 먹고살아야지….” 그때 만두는 파는 만두피가 드물어서 일일이 손으로 밀었다. 가족이 다 동원되었다. 홍두깨와 다듬잇방망이, 소주병을 쥐고 피를 밀었다.

만두는 소도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껍질’의 요리다. 손으로 민 만두 맛을 보면 알게 된다. 요즘은 손만두라고 하는 곳도 상당수 공장제품 피를 쓴다. 절반만 손만두인 셈이다. 손으로 민 노고를 가격에 더해 받기 어려운 풍습 때문이다.


요새는 김치냉장고가 보급되어 ‘쉰 김치’를 구경하기 어렵지만, 과거에는 3월의 골칫덩이였다. 음식쓰레기 분리배출이 없던 시절이라, 동네 하수구 도랑에는 버린 김치가 굴러다녔다. 쓰레기통마다 쿰쿰한 김장 버린 냄새가 났다.

어쩌다가 겨울 날씨가 따뜻하면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상난동(暖冬), 김장 망친다 아우성.” 겨우내 김장에 찬을 걸고 있는 국민들이라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김치냉장고가 나오면서 묵은 김치 소동은 끝났다. 그 시절, 우수·경칩이 지나면 김장도 짱짱한 힘을 잃었다. 집집마다 묵은 김장 처리하느라 부엌이 분주해졌다. 경상도 사투리로 갱시기라고 부르는 김치죽은 흔한 메뉴였다(이거, 요즘 팔면 사먹는 이들 많을 것 같다. 추억의 향수 음식 말이다). 굵은 멸치를 넣고 식은 밥과 묵은 김치를 푹 끓이는 너무도 단순한 요리. 목감기에 걸리면 뜨거운 김치죽을 훌훌 먹어야 낫는다고들 했다. 한 사발을 먹어도 돌아서면 배고픈 김치죽이었다. 돼지고기라도 툭툭 썰어넣으면 훨씬 맛있었을 텐데.

요리 동네에도 묵은 김치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한 ‘묵은지’는 자리를 잡았다. 묵은지 넣은 김밥도 나오고, 식당마다 어디어디 산촌에 김치를 몇 년 숙성시킨다는 광고를 한다. 묵은 것이 대세인 시속에, 때맞춰 봄이 오니 봄동과 얼갈이가 등장한다. 상큼한 맛에 입맛이 살아난다. 생각해보니, 내 몸은 김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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