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옥수수 왕국

동네 사거리에 은행이 있고, 늘 나와 있는 포장마차가 있다. 한결같이 옥수수만 판다. 고소하고 맛있다. 어쩌다가 춥거나 비가 오면 아주머니가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면 옥수수가 더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자주색 반점이 박힌 얼룩이도 좋고, 노랗고 차진 놈도 좋다. 옥수수를 다 먹고나서 잇새에 낀 옥수수씨가 튀어나오면 더 고소한 맛이 난다. 어렸을 때 옥수수를 어지간히 좋아했다. 배고픈 시절이니 뭘 가릴 형편이 아니었지만 삶아서 연탄불 아궁이에 구운 것이 어찌나 맛있던지. 그마저도 넉넉히 먹을 수는 없었다. 옥수수는 감자와 함께 우리 민족이 구황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일하는 식당에서 소 곱창을 요리해서 판다. 손질을 하다가 간혹 이상한 경우를 보게 된다. 분홍색의 연한 반투명 곱창에서 뭔가 울퉁불퉁한 이물질이 보인다. 열어보면 미처 소화되지 않은 옥수수가 나온다. 도축 전에는 일정 시간을 두고 먹이를 먹이지 않으니 옥수수 알갱이가 튀어나오는 일은 거의 드물기는 하다. 어쩌다 녀석이 먹이를 먹었을까, 아니면 죽기 전의 심리적 고통이 소화를 멈추게 한 것일까. 별 생각이 다 들고 내 속도 불편해진다. 죽은 생명을 먹이로 하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하필 옥수수일까. 그건 사료가 옥수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소가 풀로 이루어진 여물을 먹는 일은 이제 보기 힘들다. 풀을 벨 여력도 없겠지만, 옥수수 같은 곡물 사료를 먹어야 고기 등급이 잘 나오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블링이라고 부르는 근내지방은 운동억제와 곡물 사료 급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 머리카락을 잘라 분석하면 옥수수가 나온다고 할 만큼 현대는 거대한 옥수수 급식의 사이클로 돈다. 설탕 대신 쓰는 물엿도 옥수수요, 과일주스 한 잔을 마셔도 옥수수로 만든 당이 들어 있기도 하다. 달콤한 커피 한 잔에 들어 있는 당분도 옥수수요, 과자와 국수에도 옥수수 전분이 알게 모르게 들어간다.


물론 이런 옥수수가 국내산일 리 없다. 미국산 옥수수는 거대 곡물기업의 손에서 세계에 뿌려진다. 옥수수기름에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전을 부치고 옥수수로 만든 올리고당 시럽을 친 음료와 과자를 후식으로 즐긴다. 영화 한 편 볼 때 몰입을 방해하는 바삭거리는 소음 유발제도 바로 옥수수로 만든 팝콘이다(이 빌어먹을 소음을 사실상 대형 극장에서 조장하고 있으니 분통 터질 일이다).

이제는 옥수수가 고기구이용 연료로도 쓰인다. 옥수수를 재배하고 가공하거나 수송하는 데 기름이 쓰이고, 옥수수에 불을 질러 고기를 굽는다. 그것도 마블링을 위해 옥수수 먹여 비육한 쇠고기를 말이다. 그 순환 고리를 직시해보라.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우리는 이미 옥수수왕국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렇게 옥수수가 싸고 양이 많다는 건 이 기아의 시대에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유전자조작이나 농약 문제, 옥수수를 장려하는 미국의 정치적 패권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풍요가 오히려 두려운 시대, 나의 과잉인가.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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