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순대 틈에 소시지 한 줄

현대에서는 거의 사라져가지만, 유럽의 겨울은 ‘돼지 김장’하는 계절이었다. 농한기에 돼지를 잡아서 겨우내 먹을 양식을 만들었다. 유럽 주택의 지하에 소시지가 주렁주렁 걸리는 일은 흔한 풍경이었다.

돼지는 농사짓는 지역에서 원래 자라났다. 인간과 비슷한 음식을 먹는지라, 그 부스러기가 생겨야 기를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돼지는 인간과 먹이 경쟁을 하기 때문에 닭처럼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가지 않았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쨌든 유럽은 농사를 많이 지었고, 돼지 먹이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기른 돼지는 넉넉한 식량이 되었다. 구워 먹기 좋은 살코기는 그대로 요리하고, 주로 ‘비인기 부위’와 내장을 ‘김장’ 재료로 삼았다. 직접 그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특히 소시지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순댓국에 넣어 먹는 돼지머리, 족발을 소시지 재료로 썼다. 식용유가 흔해지면서 거의 찾지 않는 돼지 기름도 소시지의 소중한 재료가 된다. 기름(비계)을 넣지 않으면, 소시지 맛이 별로다.

한국의 순대도 돼지 피와 기름을 넉넉히 넣어야 맛있다. 소시지는 순대와 사실 친척이다. 창자에 고기와 피, 양념을 넣는다는 기본적인 요리법은 똑같다. 한국의 순대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기 대신 당면을 넣어 만들게 된 것을 빼고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순대에 당면이 들어간 것은 반가운 일일 수도 있다. 고기 맛 보기 어렵던 시절, 고기 채워 넣은 순대는 너무도 비쌌을 것이다. 공장에서 입수한 당면 부스러기는 순대에 들어가서 ‘한국형 소시지’의 세계를 열었다. 그 덕(?)에 우리 순대는 세계에서 가장 싼 소시지가 됐다. 순대는 소시지가 아니라면 할 말이 없지만.


최근 몇 가지 법률이 정비되어 동네 정육점에서도 소시지나 햄을 만들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물론 가정에서 소시지를 만들 수도 있다. 가족을 위해 소시지 한 꾸러미를 삶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창자를 구하기 어렵다면, 인터넷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콜라겐 케이싱을 대신 쓰면 된다. 정육점에서 갈아낸 고기와 비계를 사고, 원하는 양념을 넣어 만들 수 있다. 일하는 식당에서 아쉬운 대로 소시지를 만들어 요리해보았다. 첨가물이 어떻네, 뭐네 하는 걱정이 없는 손 소시지다. 소금간도, 단맛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한국인의 오해 중 하나는, 여전히 전통적인 나물과 채소 중심의 식사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이미 우리의 고기 소비량은 만만치 않다. 기왕지사, 소시지 정도는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원하는 고기를 척척 채워넣고, 삶고 찌는 과정이 음식문화의 한 정수이기도 하다. 오래전, 우리 할매들이 직접 순대를 쪄냈던 시절의 재현이라고도 하겠다. 삶아서 쓱쓱 썰어서 맥주 안주로도 그만이다.

순대는 원래 몽골족을 통해 한반도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순대를 먹어온 오랜 세월, 이제 소시지도 그 틈에 한 줄 앉아보는 건 어떨까. 어머니가 예전에 반찬으로 싸주시던 분홍색 밀가루 소시지 말고, 진짜 소시지 말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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