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도로는 도시의 얼굴

이일훈 | 건축가






예전에 시골에선 일 이 십리길 걷기는 예사였고 도시에서도 버스정류장 한두 구간은 걸어 다녔다. 요즘엔 가까워도 차를 탄다. 붐비는 도로는 걷는 게 빠른데도 굳이 자동차를 이용하니 일상생활에서의 걷기는 드물어지고 마음먹고 하는 운동으로서의 걷기는 대유행이다. 지자체마다 걷는 길을 만들고 꾸미느라 머리를 싸맨다. 멋들어진 길 이름에 이색적인 주제를 내걸고 걸으려는 방문객을 유혹한다.


걷는 길을 만드는 것을 뭐라 할 일은 아니지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꾸민 길은 어딘지 어색하다. 걷기의 생활화는 굳이 걷는 길을 찾아 차타고 멀리 찾아가지 않고 주변의 길을 일상적으로 걷는 것이다. 일상의 걷기야말로 진정한 걷기다. 그러자면 일상적 길의 안전과 편안함이 기본이다. 차가 많은 도시에서는 더 그렇다.


큰 네거리에서 공사 중인 인도를 만났다. 여기저기 모래더미와 자재가 쌓여 있는데 안내원·안내판은 찾을 수 없고, 임시통행로도 내지 않고, 발은 빠지고, 유모차는 아예 들고 가더라. 시민들의 안전과 편의를 챙기는 수준은 지방 면사무소만도 못하게 한심하고 무심한 그 도시, 해마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와 국제만화축제 등을 주최하더라. 그런데 사람이 걷는 길을 손보는 자세는 국제적 수준에서 한참 멀더라.


<이일훈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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