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액자에 갇힌 ‘생각’ 홍제천은 북한산과 한강을 잇는 서울의 주요 하천 중 하나이지만 본래 모습은 거의 없다. 물길 위로 고가도로까지 놓이니 하천의 한유함은 도회적 번잡함으로, 둔치의 해찰은 바퀴의 질주로, 풀숲과 돌 틈엔 밤낮없이 차량소음이 고인다. 그것은 도시의 밀도와 교통량의 증가가 불러온 변화로 과거에 없던 도시모습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거북해하는 거대한 교각에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그림이 걸려 있다. “잘했다” “멋있다”는 이도 있지만 “아니 홍제천에 뜬금없는 인상파 그림?” 하며 비웃기도 한다. 저마다 제 맘의 그림만을 원하는 감상평과 훈수가 넘치지만 으뜸 방책은 교각구조물 자체를 깨끗하게 관리하여 구조미를 드러내는 일이다. 혹 꾸밈이 필요하다면 구조물과 조화되는 새로운 미술형식을 탐구할 일이다.. 더보기
바보야, 문제는 직선이야 직선은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비행기. 그럼 비행기를 타고 직선으로 가면 어디든 제일 빨리 갈까. 출발과 도착 지점의 도로망, 공항의 접근성과 주변의 교통연계 상황 등을 종합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서울에서 인천을 가는데 비행기를 타면 가장 빠를까. 우선 복잡한 서울 시내를 지나 김포공항까지 가서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으로 인천시내로 들어가야 하니 차량을 이용한 것보다도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린다. 그래서 김포공항과 인천공항 사이에는 항공노선이 없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나 직선이 빠르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하나. 간단하다. 경인운하를 가보면 된다. 트럭으로 30분 걸리는 거리(18㎞)를 배로 가면 2~3시간 걸리니 화물터미널은 늘 파리를 날.. 더보기
양과 질에 대한 오해 여름만 되면 해수욕장마다 피서객이 많은 것을 자랑한다. 수십만명은 보통, 100만명이 모였다고 떠들기도 한다. 10만명이 모였다는 어느 해수욕장을 항공사진으로 분석했더니 반에 반도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마구잡이 셈이라도 과장이 너무 심해 믿지 말라는 말로 들린다. 아니 믿는 사람이 바보다. 지나치게 인파가 많으면 행락의 질이 엉망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숫자만 불린다. 반대의 경우를 촛불집회에서 본다. 한편에서 3만명이라면 다른 쪽에선 7500명, 5만명이라면 1만6000명.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광장의 밤이 너무 어두워 잘못 세는가 보다). 그렇게 사람 수를 늘리고 줄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아닌 숫자에만 관심을 두는 ‘질보다 양’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러면 ‘양보다 질’의 사고는.. 더보기
행복에 반대하다 ‘헐!’ 황당하고 놀라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표하는 비속어. 어이없거나 야유와 조롱을 뜻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헉이 변했다 하고, 허(虛)얼에서 왔다고도 하지만 둘 다 근거가 없는 소리. 내 맘에 안 들고 못마땅하다는 속어일 뿐이다. 그 헐이 대문짝만하게 큰길가에 나붙었다. ‘행복’주택의 건립을 반대한다는 헐! 남의 행복이 내가 반대할 일인가.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인가. 그럼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어서는 더욱 아니 될 일. 저 ‘헐!’을 외치는 이들에게 행복주택은 불행주택이다. 행복주택은 ‘토지사용료가 낮은 국공유지에 복합 주거시설을 조성’하여 시세보다 싼 임대료를 받겠다는 국토교통부의 임대주택정책. 집 없는 이들의 행복을 위한 정책이 불행.. 더보기
발광시대의 이웃 산과 들에서 취사를 금하지 않던 시절은 불판의 시대였다. 여기저기 돗자리를 깔고 생전에 처음 본 듯, 못 먹고 죽은 귀신 씐 듯이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그 시절 어느 날, 어떤 절집 계곡에 행락객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대웅전 마당까지 넘어오더라. 소란은 그나마 참을 만한데 담장을 넘어오는 고기 탄내는 부처님께 참으로 민망하더라. 아무리 제 맘대로 먹고 놀아도 육식을 금하는 절집 옆에서 고기를 굽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하더라. 아무리 믿음이 다르고 없다 해도 이웃종교에 대한 존중이 없더라. 배려도, 염치도 다 없더라. 무엇을 먹고 안 먹고는 그저 고유한 먹거리문화 중의 하나일 뿐 옳고 그름을 가릴 일이 아니건만 88서울올림픽 때는 외국인들에게 혐오감을 준다고 개장국을 금했다. 그러자 보양탕·영양탕으로.. 더보기
장소는 기억이다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단양엘 갔더니 산천물색 좋은 사이 ‘피화기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여 지인에게 물으니, ‘난리가 나도 화를 입지 않을 터’라고 한다. 6·25 때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살았더란다. 얼마를 더 가다 ‘통한의 곡계굴 위령비’를 보았다. “1951년 1월20일(음 12월12일) 오전 10시경 미군이 곡계굴과 노티마을 일대를 폭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마을 가옥 50여 호가 전소되고, 곡계굴 내부에 피란차 은신 중인 주민과 피란민 약 360여 명이 사망 또는 부상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곡계굴 안에서 불타거나 질식해 사망하였고, 일부 굴 밖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은 기총 사격에 의해 사망 또는 부상했다. 이 가운데 생존한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더보기
풍경 속의 태도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水深可知人心難知)’는 말은 항상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뒤에 나온다. 속을 살피지 않고 입맛대로 판단하는 이들이 주로 겪는다. 왜 그럴까. 속이란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오판의 위험성이 있음에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의 힘은 열 중 하나라도 보이는 데서 온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지만 대놓고 보이려는 것은 함정이기 쉽다. 흑심이란 요물은 평소에 잘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산다. 공사현장의 화장실은 대부분 후미진 곳에 옹색하게 형식적으로 만든다. 할 수 없이 일은 보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도 개선이 잘 안되는 이유는 공사만 끝나면 철거한다는 생각으로 소홀하게 만드는 탓이다. 그런 곳은 쓸수록 지저분해지니 매일 볼일을 봐야 .. 더보기
‘참을 수 없는’ 건축의 ‘가벼움’ 땅거미 진 어느 골목에서 보았다. 짐작컨대 저 건물의 내부는 층을 쌓는 바닥도, 칸의 가름도 없는 하나의 높고 넓은 공간이리라. 살펴보니 그곳은 비바람만 피하려는 철재가공공장이더라. 이름 짜한 갤러리의 비싼 조명보다 더 근사하게 비치는 외벽은 실은 대낮에 작업공간에 햇빛을 들이려고 반투명한 재료를 쓴 것이니 밤 풍경은 그저 덤이더라. 필요한 넓이에 기둥을 박고 경사지붕을 덮으니 형태는 단순하고 재료는 소박하여 무엇 하나 꾸민 게 없이 담백하더라. 건축이란 대지를 존중함이 마땅하지만 그런 경우는 가뭄에 콩 나고, 공공건축 또한 세상을 향해 문 닫기 일쑤다. 공동주택에서조차 공동성의 실천을 보기 어려우며, 문화와 예술을 앞세우고도 쓰임새 없이 놀고 있는 반문화적 건물은 얼마나 많은가. 주변의 여러 맥락, 사.. 더보기
마음속의 삼원색 비 내리는 봄날, 기운찬 새순과 흐드러진 춘색을 누르며 강렬한 삼원색 꽃이 걸어가더라. 모든 색이란 본디 좋고 나쁨, 귀하고 천함의 구분이 없다. 눈에 보이는 색깔은 각각이 다 고유하다. 특정한 색에서 특정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색의 보편적 성질이 아닌 개인적 경험이거나 편견 또는 감성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본디 말이 없는 색에 감정을 실어 수선을 떤다. 진실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명백함을 뜻하는 빨간색은 위선에 동원되면 ‘새빨간 거짓말’이 되어 더 붉어지고, 권위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노란색은 주의·조심에 쓰이는 경고색이 되기도 한다. 파란색은 신성하고 희망적인 뜻과 함께 우울함을 나타낸다. 빨강 노랑 파랑, 그 원색이 비율을 같게 또는 다르게 이루어내는 오만색의 찬란한 행렬은 얼마나 신비한가. 하.. 더보기
다시 5·18 1980년 5월18일 전후, 광주에선 어이없고 황망한 일이 벌어졌건만 많은 이들은 알지 못했다.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어제의 일이건만 먹고살기 바쁜 세상은 참으로 무심하다. 잘 먹고 잘 살려는 핑계로 그 일을 모른 체한다면 역사 또한 우리를 기망하리라. 역사공부의 비법은 눈으로 읽은 책을 마음으로 다시 한번 더 읽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날의 기록을 다시 펼친다. 6월항쟁 사진집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에서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참여한 ‘평화로운 시위’ 장면부터 ‘처참하게 학살당한 시민들의 유해’와 시신들을 본다. 사진집 (5·18기념재단, 2006)에서 ‘쓰러진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홧발로.. 더보기
바다 위를 걷고 싶다 ‘빛이 있었다’는 태초에 길은 없었다. 빛과 어둠 사이의 시간과 명멸하는 뭇 생명을 관할하는 조물주도 길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은 오로지 인간만의 영역이다. 어디 인간 아닌 존재가 만든 길을 본 적이 있는가, 들은 적이 있는가. 인간만이 길을 만든다. 인간이 걷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길의 변천사는 곧 인간의 역사다. 길은 인간의 삶과 삶터를 잇고 있게 한다. 작은 집단에서부터 너른 문화권의 교류·왕래·소통을 위해 만드는 길이 거꾸로 삶을 잊게 하는 수도 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길 중에 곧고 너른 길들은 대부분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장벽이 된다. 느린 움직임의 모든 존재를 무시하는 고속도로, 강과 연결된 생태 고리를 끊는 강변도로, 바다와 뭍의 유기적 관계성을 차단하는 해안도로, 지리·지형·지물의.. 더보기
공갈빵이 아니라 공간빵이다 빵이나 떡은 만드는 재료가 이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보리빵·옥수수빵은 주재료가 이름이 되고 쑥떡·콩떡·팥빵은 부재료가 이름이 된다. 술빵이나 꿀떡은 특징적인 맛이 이름이 된 경우다. 생긴 꼴로 불리기도 하는데 붕어빵·곰보빵이나 꽈배기과자가 그런 경우다. 부산에 사는 제자가 날 보러 오면서 오래되고 소문난 중국집 빵을 사왔다. 둥근 모양에 속이 텅 비었다. 겉만 보고는 밀가루 구워진 맛을 짐작했는데 속에 발린 설탕 맛이 달고 씹히는 참깨 맛이 고소했다. 빵보다는 과자에 가까운데 이름은 엉뚱하게 공갈빵이더라. 공갈은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 빵에 무슨 거짓이 있을까. 둥근 빵이나 바람 빵 아니면 속 빈 빵으로 부르지 않고 공갈빵이라 하는 것을 보면 속이 꽉 찼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재미가 공갈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