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흔들리며 웃는 꽃 이일훈 | 건축가 갈등이란 ‘견해·주장·이해 등이 뒤엉킨 반목·불신·대립·충돌’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불화·번민·혼란·혼돈·다툼과 불통은 칡(葛)과 등나무(藤)의 습성을 빼닮았다. 칡은 시계바늘과 반대로 도는 왼쪽감기로 자라고 등나무는 오른쪽감기를 하니 둘이 엉키면 풀기가 어렵다. 하지만 감는 방향이 다르다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습성은 다르되 조화를 이루는 식물이 얼마나 많은가. 풀리지 않는 갈등의 결정적 이유는 서로의 방향 다름보다 각각의 줄기가 자랄수록 자신만을 키우며 굵어지고, 자신만을 지키려 점점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부드러워 보이는 곡선의 넝쿨도 경직되면 돌과 같다. 반대로 휘청거리는 갈대나 억새의 줄기는 곧아 보이지만 유연하다. 변하기 쉬운 여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하는데 실은 여자.. 더보기
집보다 더 중요한 것 이일훈 | 건축가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파고 제비는 진흙을 물어다 제집을 만든다. 까치는 잔가지를 얹어 둥지를 튼다. 딱따구리는 조각적, 제비는 소조(塑造)적, 까치는 결구하는 방법을 쓴다. 쪼고 붙이고 엮는 것은 다르지만 목적이 같은 새들의 집짓기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집 자리(장소·위치)를 정하는 감각이다. 새는 번식이 끝나면 미련 없이 둥지를 버리거나 떠난다. 새들에게 둥지란 소유 아닌 사용이 목적이라서 남을 의식해 꾸미거나 필요 없이 두세 채를 갖지 않는다. 인간의 건축적 관점과 매우 다르다. 누군가 매단 새집, 팔 뻗으면 닿는 높이에 바람이 불 때마다 불안하게 흔들리니 새들이 깃들일 턱이 없어라. 공원 숲에 새집 아닌 새집만 늘었더라. 조류보호 한다고 새집만을 다는 것은 새의 생리와 별 .. 더보기
빽 없이 오는 봄 이일훈 | 건축가 비속어 ‘빽’은 필시 배경을 뜻하는 단어(background)에서 왔을 것이다. 출신 배경을 팔아 입지하고, 권력과 가깝게 지내며 행세하고, 의사결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주변의 힘을 이용해 검은 이득을 취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벌을 면하고…, 좌우지간 부당하고 불순한 의도를 깔고 있는 빽만큼 이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말이 어디 있으랴. 예전엔 없는 사람들이 찾았는데 요즘엔 있는 사람들이 대놓고 끼리끼리 지키려 안달이니 빽의 얼굴도 점점 뻔뻔해지는 모양이더라. 빽과 빽이 공생·기생하는 빽의 전성시대, 가히 철면피를 넘어 ‘빽면피’의 세상이더라. 이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유빽무죄 무빽유죄’로 바뀔 날이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더라. 불상에도 빽을 두른 것이 있으니 바로 광.. 더보기
마음 없이 절하는 기계 이일훈 | 건축가 인사란 드러나는 예의다. 매일 만나도 정중한 예의를 표해야 할 경우가 있고 드물게 만나도 가벼운 경우가 있다. 진심으로 하는 인사가 있고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다. ‘절하고 뺨 맞는 일 없다’는 속담을 보면 예의를 표해서 손해 볼 것 없다는 것이 인간사지만 내용 없는 형식적 인사는 어딘가 공허하다. 인사가 건성이라면 관계도 건성일 것이리라. 설날 세배는 예의를 갖춘 큰절, 만수무강 축원과 소원성취 덕담까진 좋은데 이어지는 대화가 불편한 경우가 많다. 뜸하고 드물게 만나는 친척일수록 덕담 아닌 질문을 하고, 평소에 교류 없고 무관심한 관계일수록 답하기 곤란한 말을 꺼낸다. 이력서 쓰느라 지친 백수에게 결혼은 언제 하나, 연봉은 얼마냐, 입시에 떨어진 아이에게 어느 대학 갔냐고 물으면 옆에.. 더보기
구름을 찍다 이일훈 | 건축가 시내 어디를 지나는데 담장에 ‘촬영금지’ 표식이 붙어 있더라. 담 높이는 한 길도 넘어 안은 안 보이고 사진을 찍어봤자 시멘트 블록만 찍히겠더라. 조금 더 가니 낮은 정문 너머 안이 훤히 보이는데 군용차와 승용차가 몇 대 서 있더라. 아하, 군부대라서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이었구나. 그런데 부대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와 고층건물은 부대 연병장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더라. 김포공항에도 같은 표식이 붙어 있더라. 비행기 타고 여행 가는 이들이 활주로나 항공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것도 안된다는 말인데 민간항공기가 무슨 군사기밀인지 잘 모르겠더라. 만약 불순한 목적으로 공항을 촬영한다면 누가 대놓고 찍겠는가. 기밀로 할 것이라면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이 이치에 맞다. 눈으로 보는 것은 괜찮.. 더보기
[사물과 사람 사이]사다리의 이중성 이일훈 | 건축가 사다리는 높이와 깊이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욕망의 기구로 공간의 면적과 비용을 절약하려는 관점의 산물이기도 하다. 불통의 공간에 이르는 과정에 꼭 필요한 사다리는 근본적으로 계단보다 위험하다. 필요와 위험의 이중성을 지닌 사다리는 희망과 절망을 같이 품고 있다. 오르려는 곳에 잘 놓인 사다리는 희망이지만 먼저 오른 사람이 뒷사람은 오르지 못하도록 걷어찬 사다리는 절망 그 자체다. 꿈에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길몽, 반대로 내려오거나 쩔쩔매면 흉몽이다. 하지만 해몽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썩은 사다리라면 의미가 없다. 사다리의 얼개와 구조를 보려면 파몽(破夢) 아니면 길이 없고, 측면만 보면 실상을 알 수 없다. 앞뒤 좌우 위아래를 다 훑고 속을 비추어 그림자까지 봐야 전체가 보인다. 대선판에.. 더보기
[사물과 사람 사이]불리는 것에 대하여 이일훈 | 건축가 연필에 지우개를 붙여 하나로 만든 아이디어는 두 가지를 따로 챙기는 성가심을 해결한 그야말로 대박상품이었다. 새로운 제품이란 이전에 없던 것보다 전에 있던 것들을 변용·변화·개선시킨 것들이 더 많다. 비슷한 쓰임새를 합칠 수도 있고, 전혀 상관없는 기능을 더할 수도 있다. 잡다한 기능 중에서 소용없는 것을 과감히 버려 개선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욕심으로 합쳤으나 큰 소용이 닿지 않는 경우도 있다. 파란색 합성수지의자 위의 붉은 원통은 통행을 차단하는 목적으로 설치할 때는 ‘차단봉’, 안내를 목적으로 할 때는 ‘유도봉’으로 불린다. 그것이 의자와 한 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의자차단봉’ ‘의자유도봉’ ‘유도봉의자’ ‘차단봉의자’ ‘봉의자’ 또는 ‘의자봉’. 어떻게 부.. 더보기
꽃 도둑 심보 이일훈 | 건축가 멀리서 보니 위장무늬 군복을 입은 버즘나무가 크고 하얀 명찰을 달고 있더라. 가까이 가보니 A4 용지에 정성들여 또박또박 쓴 글이 가득, 비가 와도 젖지 않게 비닐로 투명 씌움까지 해서 누름 못으로 박았더라. 못이 박히는 그 순간 버즘나무는 얼마나 놀라고 따끔했을까. 아마 누름 못자리가 급소였다면 나무는 놀라 소리 지르고 눈물을 찔끔 흘렸을 것이다. “어린이집 화분을 가져가신 분은 다시 제자리에 놓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분은 저희 원아들이 자연체험학습활동을 위해 자유롭게 관찰하고 있는 교구입니다. 꽃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면 합니다.” 아, 그렇구나. 누군가 화분을 훔쳐갔구나. 화분을 가져간 사람이 버즘나무에 붙어있는 글을 읽는다면 속이 뜨끔할 거다... 더보기
부재증명의 풍경 이일훈|건축가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천만의 말씀. 세상에 ‘사람 없어 비워 둔 의자는 없’으니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던 1960년대 유행가 ‘회전의자’의 흥겨운 장단 속에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처절함이 스며 있다. 1970년대 말의 유행가 ‘빈 의자’는 ‘피곤한 사람은 오시오 나는 빈 의자 당신을 편히 쉬게 하리다’고 고단한 삶을 위로한다. 그 노랠 따라 부르던 이들은 지금 어떤 의자에 앉아 있을까. 빛나는 의자일까, 초라한 의자일까. 의자는 형태와 배치에 따라 드러내는 욕망이 다르다. 서울시청 시장실의 회의용 의자에는 갖가지 사연이 녹아있다. 인권 수호에 힘쓰던 조정래 변호사의 의자, 사라진 대림시장에서 장사하던 상인이 쓰던 의자, 나이트클럽의 불을 끄.. 더보기
‘까칠한’ 아이를 태운 초보 이일훈 | 건축가 초보운전자는 승용차 뒤 유리창에 뭘 써 붙인다. 초보인 줄 알면 더 겁주며 무시한다고 써 붙이지 말라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초보임을 알려 이해를 구한다. ‘초보운전’이 고전답게 가장 많고, ‘답답하쥬 저는 환장하겄슈’ 같은 솔직한 고백도 있지만, ‘세 시간째 직진 중’은 엄살이 지나쳐 믿기지 않는다. ‘첫 나들이’는 곱디고운 우리말이 새삼스럽고, 노란 병아리 한 마리를 크게 그려 붙인 그림은 시각적 호소력이 대단하더라. 초보가 아니어도 장애인이나 노약자임을 알리는 표시도 있다. 그럴 경우 양보하고 배려함이 마땅하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는 아이가 탔으니 양보해 달라는 부탁이다. ‘아이 태운 초보’는 보는 사람이 더 긴장되더라. 아, 아이를 태웠군요,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천천히 조심.. 더보기
쩐의 태풍 이일훈 | 건축가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거나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속담은 돈의 위력이 오래 묵었음을 보여준다. 돈을 일러 ‘쇳가루’라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돈을 뜻하는 동전(銅錢)에 쇠금(金)자가 들어있어 그랬을 것이다. 요즘 돈의 비속어는 전(錢)이다. 돈에 대한 욕망과 불만을 버무려 그냥 ‘전’도 아니고 ‘쩐’이라 한다. 몇 년 전, 드라마 이 큰 인기를 끌었다. 아마 점잖게 ‘돈의 다툼’이라 했다면 인기가 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다 속담 속의 ‘돈’도 ‘쩐’으로 변할지 모르겠다. ‘쩐이면 지옥문도 열’리고, ‘쩐이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쩐을 주면 배 속의 아이도 기어나오’니 과연 ‘쩐이 양반’이라고. 얼마 전 태풍 산바가 한반도를 뒤훑던 날, 합정역 사거리를 지나다가 거센.. 더보기
꽃보다 뿌리 이일훈|건축가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꽃이라 한다. 어떤 일의 핵심이나 번영과 절정의 상태도 꽃이라 한다. 한마디로 존재의 빛남이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 한다. 그럼 선거의 꽃은? 물론 공명정대한 관리와 자유로운 의사표현이지만 정치인들은 오로지 당선만을 꽃으로 여긴다. 인식이 그 수준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흙탕물을 튀기고 잡음을 일으키면서도 꽃이 되려 한다. 피기만 하면 되는 줄 안다. 하지만 식물의 생리에선 꽃만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뿌리·가지·줄기·잎의 가운뎃점(·)은 서로를 떼는 것이 아니다. 뿌리-가지-줄기-잎은 줄표(-)처럼 이어진 유기작용의 결과다. 그렇구나, 꽃은 뿌리와 이어진 한몸이니 제대로 살피려면 현혹의 꽃잎 너머 뿌리를 봐야 한다. 아니, 뿌리야말로 보이지 않는 꽃이로다.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