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마음 없이 절하는 기계

이일훈 | 건축가



 




인사란 드러나는 예의다. 매일 만나도 정중한 예의를 표해야 할 경우가 있고 드물게 만나도 가벼운 경우가 있다. 진심으로 하는 인사가 있고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다. ‘절하고 뺨 맞는 일 없다’는 속담을 보면 예의를 표해서 손해 볼 것 없다는 것이 인간사지만 내용 없는 형식적 인사는 어딘가 공허하다. 인사가 건성이라면 관계도 건성일 것이리라.


설날 세배는 예의를 갖춘 큰절, 만수무강 축원과 소원성취 덕담까진 좋은데 이어지는 대화가 불편한 경우가 많다. 뜸하고 드물게 만나는 친척일수록 덕담 아닌 질문을 하고, 평소에 교류 없고 무관심한 관계일수록 답하기 곤란한 말을 꺼낸다. 이력서 쓰느라 지친 백수에게 결혼은 언제 하나, 연봉은 얼마냐, 입시에 떨어진 아이에게 어느 대학 갔냐고 물으면 옆에서 듣기도 불편하다. 그런 말은 대부분 딱히 할 말이 없어 꺼내는 경우가 많다. 별 관심도 없으면서 결혼·연봉·성적 등을 묻는 것은 의례적(형식적)인 수준을 넘어 기계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어느 식당 앞에 절하는 기계인형이 시간의 간격과 방향이 일정하게 꾸벅이더라. 볼 때마다 마음 없는 말을 듣는 것 같아 찜찜하더라. 지난 설날에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기계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