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쩐의 태풍

이일훈 | 건축가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거나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속담은 돈의 위력이 오래 묵었음을 보여준다. 돈을 일러 ‘쇳가루’라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돈을 뜻하는 동전(銅錢)에 쇠금(金)자가 들어있어 그랬을 것이다. 요즘 돈의 비속어는 전(錢)이다. 돈에 대한 욕망과 불만을 버무려 그냥 ‘전’도 아니고 ‘쩐’이라 한다. 몇 년 전, 드라마 <쩐의 전쟁>이 큰 인기를 끌었다. 아마 점잖게 ‘돈의 다툼’이라 했다면 인기가 덜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다 속담 속의 ‘돈’도 ‘쩐’으로 변할지 모르겠다. ‘쩐이면 지옥문도 열’리고, ‘쩐이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쩐을 주면 배 속의 아이도 기어나오’니 과연 ‘쩐이 양반’이라고.


얼마 전 태풍 산바가 한반도를 뒤훑던 날, 합정역 사거리를 지나다가 거센 비바람을 맞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흔들리는 깃발도 위태로운 천막도 모두 젖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 그곳을 다시 지나게 되었다. 천막과 깃발 그리고 외치는 소리 모두 그대로였다.


‘합정동 홈플러스 입점 결사반대’, 그들이 맞서고 있는 것은 지나가는 열대저기압이 아니라 시도 때도 장소도 업종도 가리지 않는 대형자본의 폭풍이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시절, ‘쩐이 쩐을 버’는 멈출 줄 모르는 ‘쩐의 태풍’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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