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는 응집력과 설득력을 지닌 자기 지시적 언어의 집합체인 ‘담론’을 통해 지구촌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적 파괴의 모델로서 자리해야 한다. 대중과의 호흡을 전제로 복잡한 사회 속 틈을 제시하고, 인류 앞에 놓인 과제들을 ‘공동의 목소리’로 혁파할 수 있는 ‘정지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문화시설인 미술관 전시와 다른 비엔날레만의 특징이다.
하지만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한 한국의 거의 모든 비엔날레(3년마다 개최되는 트리엔날레 포함)는 담론 생성에 무관심하거나 능력이 안 된다. 20개가 넘는 비엔날레가 격년으로 열리지만 대부분은 본령인 현실과 제도에 대한 비판적 논쟁의 장과는 무관하다. 변별력 없는 광경에 막대한 혈세를 쏟아붓는 공허한 관변행사이자 지자체 홍보수단으로 전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엔날레의 성격을 담보하는 것 중 하나는 작품이다. 그러나 특정 주제 아래 소비되는 ‘독백’의 향연이기 일쑤다. 관람객은 건강하고 미래 지향적인 문화적 토론을 이끄는 또 하나의 축이어야 함에도 대개는 일방적 소통을 강요받는 피동적 위치에 머문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거대하고 높은 공간에 내걸려 혼잣말만 해대는 작품들을 바라보는 게 전부다.
한국의 비엔날레들이 유독 관심을 갖는 건 장소다. 날것 그대로의 장소를 선호한다. 많을수록 좋다. 서사가 배어 있거나 이야기를 함축한 장소라면 더할 나위 없다. 어떤 장소란 때로 사회·정치적 맥락 속 인간 삶과 상호작용해온 특별한 상징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설픈 내용을 덮는 알리바이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곧잘 장소 자체의 존재감에 만족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런 장소들은 개성 있으나 관객 및 작품과 관계 맺는 무대로 귀결되지 않는 한 의미 부여는 쉽지 않다. 너무 강해 작품이 장소에 함몰되거나 불협화음에 놓이는 경우가 한 예다.
당장 ‘물결 위 우리’를 주제로 한 ‘2022 부산비엔날레’(9월3일~11월6일)만 해도 그렇다. 일단 전시의 형식은 장소마다 줄줄이 작품을 늘어놓는 낡은 문법을 답습한다. 다수의 작품은 일방통행에 그친다. 특히 전시장소로 쓰인 부산항 제1부두와 영도구 폐조선소 공장은 동시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창작의 경로를 확인시키지 못한 채 작품을 집어삼킨다.
물론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그 어느 때보다 부산의 지역적 색깔과 정서·역사·기억들을 다양한 조형으로 다룬다. 노동·이주·여성·도시생태계 등의 소주제는 ‘물결’을 따라 시공의 경계 없이 교차하며, 환경과 생명, 역사 ‘위’에 놓인 ‘우리’는 개별적 존재자가 아닌, 전 지구적으로 엮인 실제자임을 일러준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미술담화의 생성과 미적·사회적 공론의 성취를 달성했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주제 및 전개방식은 진부하고 결론 역시 충분히 예상된다. 비평적 논쟁 혹은 제안 또한 잘 읽히지 않는다. 비엔날레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부산의 혼종성을 표피적으로 해석한 ‘아카이브 전’에 가깝다. 지역을 재발견할 수 있는 자료를 잘 그러모았으나 전위적 실험의 본보기로는 꽤나 부족하다. 비엔날레의 얼굴을 한 미술관 기획전 수준이었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까.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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