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돼지국밥과 노무현

부산 출신인 내 친구는 농담 삼아 서울살이의 불편함을 두 가지 들곤 한다. 순대 먹을 때 쌈장 안 주는 것, 그리고 맛있는 돼지국밥집이 없다는 것이다. 영문 모르는 나는 “어이, 순댓국밥이 있는데 뭘”하면 손사래를 친다. “그기, 서로 다른 기다. 니는 간짜장과 짜장이 같나?” 이런다.

 

부산에 여러 번 돼지국밥 취재를 갔다. 만드는 방식에 어떤 원칙은 없어보였다. 누구는 사골이나 머리뼈를 넣지 않는 것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넣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부산의 신문을 검색하면 이 음식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을 몇 가지 알 수 있다. 종친회나 동창모임이 으레 돼지국밥집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서울 순댓국집에서 그런 행사가 열리는 건 드문 일이다. 또 개업인사 코너에 돼지국밥집이 유독 많다. 아닌 게 아니라 버스 타고 부산시내를 가면, 간판이 유독 자주 눈에 띈다. 부산 지역 언론의 맛집 소개에도 으레 먼저 거론된다. 부산 출신 음식작가 박상현이 “부산 사람들 혈관에는 돼지국밥 육수가 흐른다”고 말한 것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돼지국밥은 정확한 기원은 모르지만, 해방 전에 이미 있었고 6·25전쟁 이후에 돼지를 잘 다루는 이북출신 피란민들이 결합하면서 크게 성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돼지의 묵직하고 고소한, 진한 우유 같은 국물(또는 의도적인 아주 맑은 국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비계와 살점, 여기에 탄수화물이 어우러진 완벽한 한 끼 식사가 바로 돼지국밥이다.

 

 

돼지국밥 (경향DB)

 

영화 <변호인>이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인기를 끌면서 돼지국밥이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허름한 이 국밥집과 법정을 오가며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난한 고시생 송우석의 영양을 책임지던, 그의 소탈한 성품을 뒷받침하는 배경으로, 끝내는 그가 인권변호사로 변모하게 된 결정적인 인간관계의 시발로 말이다. 돼지국밥집은 인간 송우석(그냥 노무현이라고 하자)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그만인 장치였던 것이다. 지금 부산의 돼지국밥집에는 또 다른 노무현과 민중이 드나든다. 1956년 범일동 임시정부 교통부 근처에서 첫 불을 댕긴 후 지금도 국밥을 말고 있는 할매국밥집의 흥업사에는 그들이 있다.

 

“옆에 삼화고무라고 신발공장이 크게 있었지예. 뭐 일반 노무자들도 많고, 지게를 밖에 놓고 한 그릇 하고 그랬지예. 가난한 고학생들도 큰맘 먹고 오고….” 그 지게 놓던 자리에 자가용이 들어서는 시절이지만, 여전히 할매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500원을 깎아주고 밥도 양껏 퍼준다. 가난한 시절에 이어오던 버릇이다. 시인 함민복은 설렁탕 국물 추가에 얽힌 어머니의 사연을 걸작 <눈물은 왜 짠가>로 풀어냈다. 돼지국밥 한 그릇을 시켜놓고, 그 국물 속에 깃든 염도는 그렇게 슬프고 아릿하다. 노동자의 목수건, 어머니의 낡은 몸뻬, 고학생의 반들거리는 교복 소매…. 정구지(부추겉절이) 잔뜩 넣고 뜨끈한 국밥 한 술 뜨고 싶은 날들이다. 기왕이면 부산의 어느 노포면 좋겠다. 저 골목 어디서 노무현이 올지도 모르니까.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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