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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카펫의 드라마 ‘드레스 전쟁’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지난달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왕은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으로 여우주연상을 탄 메릴 스트리프였다. 메릴 스트리프가 이날 남편 외에 가장 먼저 감사의 뜻을 전한 이는 감독이나 동료 연기자가 아니었다. 37년 전 처음 인연을 맺은 이래 영화와 시상식에서 최고의 옷과 드레스를 입게 해준 스타일리스트였다. 

여배우에게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는 스타일리스트의 역할은 연기생활만큼이나 중요하다. 아카데미, 칸 등 세계인의 시선이 모아지는 영화제의 레드카펫에서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나올 경우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최악의 드레서’로 찍히면 그의 패션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여배우들에겐 “발연기를 보였다”는 혹평보다 “옷 못 입는다”는 말이 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레드카펫에 섰을 때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몇 초간, 그리고 몇 마디의 수상소감…. 짧은 순간이지만 마케팅 전문가들은 아카데미의 레드카펫이야말로 100만달러짜리 광고 캠페인에 맞먹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데 공감한다. 
 

■ 올해 아카데미는 복고풍

뉴욕타임스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기사에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여배우들의 드레스는 1920~1950년대 미국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연상케 하는 복고풍 일색이었다”며 “파격적 노출이나 독특한 디자인을 찾아보긴 어려웠다”고 분석했다. 이번 오스카 레드카펫에선 디자이너 톰 포드의 흰색 망토 드레스를 걸친 귀네스 팰트로, 살굿빛 구치 드레스를 입은 캐머런 디아즈, 연한 군청색 조르지오 아르마니 드레스를 입은 페넬로페 크루즈, 검정 물방울 무늬가 박힌 디올의 1950년대 붉은 빈티지 드레스를 입은 내털리 포트먼, 잠바티스타 발리의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에마 스톤, 베르사체 검정 벨벳 드레스를 입은 앤젤리나 졸리가 가장 많은 시선을 끌었다. 

졸리의 검정 드레스는 평론가들로부터 아름답다는 찬사와 진부하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커다란 리본을 단 에마 스톤의 의상에는 “목에 키스마크가 생겨서 억지로 가리려는 것 같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마릴린 먼로 역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미셸 윌리엄스가 입은 붉은 계열 루이뷔통 드레스엔 “오묘한 아름다움, 독특하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패션디자이너들은 이런 비판과 찬사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찬사를 받은 패션디자이너나 브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엄청난 홍보 효과를 얻는다. 신인디자이너의 경우엔 톱스타가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스타 반열에 오른다. 올해 여우조연상을 받은 옥테이비아 스펜서가 입은 일본 디자이너 도다시 쇼지와 제니퍼 로페즈가 선택한 레바논 출신 디자이너 주하이르 무라드는 벌써 인터뷰 요청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최악의 드레스” “배우를 죽이는 복잡한 디자인” 등의 평을 받은 디자이너는 매출도 격감한다. 


■ 연예산업 키운 100만 달러의 ‘광고판’
 

레드카펫은 프랑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때 바닥에 깔았던 카펫에서 유래했다. 아름다움과 권력과 환대를 상징하는 레드카펫 위에서 스타들의 위상은 어설프게 귀족 흉내를 내는 ‘천박한 존재’에서 수백만달러의 광고 가치를 지닌 ‘권력’으로 달라질 수도 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레드카펫 문화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자료가 쏟아지고 있다. 미국의 저명 칼럼니스트 브론윈 코스그레이브는 저서 <레드카펫: 패션, 아카데미 시상식을 만나다>에서 연예산업이 흥행하게 된 데는 레드카펫을 수놓은 여배우들의 공로가 크다고 평가했다. 

레드카펫과 의상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구적인 배우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비비언 리였다. 비비언 리는 영화사에 소속된 영화의상 담당 디자이너가 시상식 드레스까지 책임졌던 관행을 깨고 파리에서 패션을 공부한 디자이너 아이린에게 옷을 맞춰 입고 나와 찬사를 받았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TV를 통해 첫 중계된 1951년 제3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새틴 소재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시상식 다음날 각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것은 6개 부문에서 수상한 영화 <이브의 모든 것>이나 여주인공 베티 데이비스가 아니라 디트리히의 레드카펫 패션이었다. 1950년대 당시 뉴룩(New Look)을 창안해 패션계에 돌풍을 일으킨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친분이 깊은 디트리히는 히치콕 감독의 영화 출연 제의에도 “디오르의 의상을 입지 않으면 안된다”는 조건을 내걸 정도로 의상에 집착했다. 


■ 레드카펫 뒤서 벌어지는 디자이너들 경쟁

할리우드 스타들의 상업적 가치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시상식을 위한 드레스와 슈트 협찬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디자이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였다. 1985년 아르마니는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사회부 기자 출신의 완다 맥대니얼을 홍보이사로 고용해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아르마니를 입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맥대니얼은 1989년 영화 <피고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자리에 우스꽝스러운 나비 리본을 엉덩이에 단 드레스를 입고 나와 웃음거리가 된 조디 포스터를 비롯, 촌스러운 패션감각의 배우들을 공략해 ‘드레스 협찬 문화’를 만들었다. 시청자들은 아르마니의 드레스를 입고 환골탈태한 스타들을 보며 아르마니에 열광했다. 레드카펫 마케팅 시작 이후 아르마니사의 1993년 매출은 4억4200달러로 1990년보다 2배나 늘었다. 당시 패션업계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아르마니 시상식’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물론 레드카펫에 드레스가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간단하지는 않다. 프라다 코리아의 이지영 마케팅부장은 “첩보작전처럼 엄청난 시간과 공이 들어가는 작업”이라고 전한다. 프라다는 평소 롱드레스를 판매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카데미나 칸, 베니스 등 시상식을 위해서만큼은 그 시즌에 맞는 테마로 드레스를 제작해 여배우들에게 특별히 선보인다. 우선 톱스타들의 명단을 정한 후 그 여배우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직접 의상을 보내서 피팅 여부를 확인한다. 몇개의 의상 가운데 스타일리스트와 여배우가 합의한 드레스를 다시 마무리한다. 

한국 여배우들도 한류열풍을 타고 위상이 높아져 프라다를 비롯해 루이뷔통, 구치, 아르마니, 디오르 등의 명품브랜드로부터 협찬을 받는다. 밀라노나 파리 등 본사에서 국제특급우편으로 배달된 옷을 입고 대종상이나 부산영화제 등의 레드카펫에 선다. 이들의 협찬 기준은 배우들의 인품과 몸매가 아니다. 철저히 유명세에 따른다. 먼저 옷을 골라도 더 유명한 톱스타나 영향력이 큰 스타일리스트가 그걸 입겠다고 주장하면 깨끗이 물러서야 한다. 레드카펫이 권력인 이유가 여기 있다. 



■ 레드카펫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전쟁터

이제 레드카펫은 우아한 경연장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전쟁터다. 귀네스 팰트로는 한 인터뷰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됐던 1999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무려 100벌 이상의 드레스를 입어봐야 했다고 밝혔다. 그만큼 많은 브랜드에서 “제발 우리 옷을 입어달라”고 구애한 것이다. 패션브랜드에서는 유명스타와 가족들을 파리와 밀라노 등지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초대하고 그들에게 고가의 드레스와 보석, 시계를 선물한다. 스타의 드레스를 담당하는 스타일리스트들에게 지방 흡입 수술, 인테리어 개보수 비용을 대주겠다는 제안도 한다. 

할리우드의 스타일리스트 레이첼 조는 어지간한 여배우보다 더 스타대접을 받고 그의 이름을 딴 패션브랜드와 쇼프로그램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할리우드 스타에게 자사의 드레스와 주얼리를 착용하게 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문화가 진화하고 있다”며 “일부 여성 배우들은 한 브랜드와 많은 보상금을 포함한 계약금을 받고 이를 착용하고 있다”는 특집기사를 내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돈을 받고 특정 브랜드를 입는 트렌드(pay-to-wear)는 지난 2008년에 시작됐다고 한다.




스타가 한 브랜드의 귀걸이를 착용하면 동시에 같은 브랜드의 향수, 목걸이, 팔찌, 지갑, 화장품 등 여러 품목서도 매출이 오른다. 아카데미시상식 경우에는 10만달러에서 50만달러 정도지만 패션쇼에서도 돈을 받는다. 패셔니스타닷컴(Fashionista.com)은 지난 2010년 패션쇼에 참석하는 각 스타들이 특정 브랜드 착용으로 받는 금액을 밝혔다. 가수 리하나는 10만달러, 비욘세 8만달러, 줄리언 무어가 6만달러 순이었다. 
 

패션마케팅전문가 이미아 서울대 연구원은 “영화가 대중의 꿈이라면 레드카펫 드레스는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면서 “대중이 스타처럼 보이고 싶다는 환상으로 명품에 소비한 돈이 스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라며 씁쓸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