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육개장

복더위에 도시 곳곳에는 냉차장수가 있었다. 사카린을 치고 보리를 끓여 만든 냉차 한 잔에 10원을 받았다. 두어 잔을 마시면 배탈이 나곤 했다. 유리나 투명 아크릴로 만든 커다란 냉차용기를 리어카에 싣고 “시원한 냉차요!”를 외쳤다. 차가운 미숫가루를 파는 노점도 있었고, 아이스케이크를 파는 가게 앞은 아이들로 문전성시였다.

탈수기인 ‘짤순이’를 닮은 기다란 냉각보존기에 조잡한 비닐 포장을 한 아이스케이크와 빙과를 가득 담고, 위에는 소금 뿌린 얼음을 채운 노란색 고무주머니를 얹어놓았다. 빙과를 빨면 더러 고무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소금물의 찝찔한 맛이 났다. 용돈이 생기면 빙과를 입에 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비닐주머니에 빙과를 담아 얼린 ‘아이차’가 득세했고, ‘쭈쭈바’가 출시돼 경쟁구도를 만들었다. 식품산업이 현대화되고 시장규모가 커지는 시기였던 것 같다. 빙과업체의 마크가 찍힌 전기냉동고가 얼음을 쓰는 냉각보존기를 밀어냈고, 나의 유소년 시절도 끝났다.

아이들은 차가운 음식으로 더위를 쫓았고, 어른들은 냉·열 양수겸장으로 여름과 싸웠다. 냉면집도 잘되었지만, 복달임에는 역시 더운 음식이었다. 요즘은 대부분 가게에 가서 사먹지만, 그 시절에는 집에서 닭을 삶았다. 시장 노점 닭전에서는 운명의 그날을 기다리는 닭을 닭장 안에 가득 채워 놓고 있었다. 우리 집도 마늘 넣은 백숙을 했다. 그때는 닭발과 내장, 머리도 같이 싸주었는데 어른들만 먹는 부위였다. 커다란 백동솥을 연탄이나 ‘곤로’에 얹어 닭을 삶으면 온 집 안이 열기로 가득 찼다. 닭을 손질한 비린내가 부엌에서 번져오고, 닭 냄새가 진해지면 입맛 다시는 닭을 먹을 수 있었다. 여섯 식구가 딱 닭 한 마리로 충분했다.


요즘 닭은 사육기간을 줄여서 효율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바뀌어 크기가 작아졌다. 삶아 먹기보다 튀김이 대세가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닭 한 마리를 온전하게 먹고자 하는 욕망이 결국 닭의 크기를 줄이는 쪽으로 몰아간 것이겠다.

우람하고 묵직한 옛날 닭을 만나기는 요즘에는 불가능하다. 삼계탕이 유행하게 된 건 월급쟁이 시대의 도래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회사’가 번성하고 시내 곳곳에 빌딩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가족 대신 동료들과 복달임을 했다. 삼계탕집이 늘어난 것도 이 시기, 그러니까 1980년대를 관통하던 즈음이다.

요즘 복달임은 삼계탕이 으뜸이지만, 예전에는 개장국과 이를 흉내 낸 육개장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육개장은 소고기 양지를 써 탕을 내는데, 전통적인 개장국의 요리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육개장은 대구가 으뜸이다. 육개장을 대구탕(大邱湯)이라고 불렀던 근현대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대파를 굵게 썰어 넣고, 고춧가루를 듬뿍 풀어 맵게 끓인 육개장 한 그릇을 먹으면 힘이 날 것 같다. 대구에 가면 육개장 명가가 여럿이다. 할머니 손맛의 옛집식당, 대구탕반의 명가 국일따로국밥에 가고 싶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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