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9) 김홍신 - 내가 숨 쉬는 한 그대는 ‘사사’ 김홍신 | 소설가·건국대 석좌교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는 후회인지 모른다.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은 영혼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게 다가오는 후회는 태풍이 휩쓸고 간 폐허 같아서 드러내기 싫었다. 사람이 스스로 움직이는 동력을 잃으면 낙엽이 된다. 아내가 그랬다. 오랜 세월 병상에서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겨우 숨을 쉬었다. 어려서 얻은 천식이 기관지 확장으로 이어지며 평생 병치레를 했고 체중은 39kg을 넘어 본 적이 없으며 마지막 2년 동안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낙엽 같았다. 에어컨 실외기만큼 큰 산소발생기, 코에 줄을 연결하는 실내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병원에 갈 때는 이동용 산소통을 들고 돕는 이가 따라가야만 했다. 아내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8) 최정임 - 일 중독 딸 최정임 | 정동극장 극장장 무용가에서 경영자로 이름을 바꿔 달려온 시간이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다. 낯선 영역에 발을 들이고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극장의 중장기 발전 3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영지표를 달성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올해 들어 쉰 날을 꼽아보니, 열 손가락도 못 채웠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 준 체력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누적된 피로가 나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재검을 종용하는 건강센터의 전화, 떨어지는 집중력, 위험수위를 알리는 건강상태 등. 주말의 숙면 뒤에 막연한 불안감과 죄책감마저 밀려드는 일중독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직업병인 듯하다. 지난 시절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77년부터 시작된 나의 춤 ..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7) 승효상 - 폭음과 바꾼 신혼 첫날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1980년 여름 나는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도피였다. 그해 5월의 광주를 보는 일이 너무 힘든 나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미국 땅은 가기도 싫었지만, 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떠나야 했으므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출신의 요셉프라처 신부의 도움을 받아 빈 공과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아 쥐고 8월 말 비행기를 타게 된다. 나는 71학번이니 유신체제가 본격 가동될 때 대학을 다녔다. 휴교령으로 으레 학교수업은 비정상이었지만 간혹 듣는 강의도 신통치 못해 나는 대학을 겉돌았다. 시위대에 가담하는 것도 잘 허락되지 않았다. 그 당시 데모의 주동이던 고등학교 선배가 내게는 건축 공부에 전념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마 미친 듯..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6) 윤호진 - 원망스러웠던 한국 윤호진 | 에이콤인터내셔널 대표 “도대체 난 왜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이렇게 원망이 가득 담긴 후회를 해본 적이 있다. 사실 연극을 만들며 연출가로서의 미래를 찾던 나에게 1980년대의 한국은 그리 호의적인 곳은 아니었다. 항상 배가 고팠고, 집에 갈 차비도 없어서 먼 길을 걸어 다녔다. 그 와중에도 극단 사람들의 열의만으로 부족한 다른 부분을 채워가며 공연을 올렸다. 한마디로 전망은커녕 고달픈 삶이 보장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1982년 처음으로 해외연수차 바다를 건너 다다른 영국은 딴 세상이었다. 연수생으로선 운 좋게도 내셔널시어터에서 하는 프로덕션의 제작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옵서버의 기회를 얻었는데, 연출가의 상상이나 아이디어가 제시된 다..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5) 구효서 - 단풍 든 암자의 그 모시잎떡 구효서 소설가 새벽 두 시. 나는 어느 집 담장에 붙어 섰다.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내 손에는 M16 소총이 들려 있었다. 숨을 죽이고 집안의 동태를 살폈다. 내 곁의 동료도 긴장한 눈을 번뜩이며 철모를 깊숙이 눌러 썼다. 종이를 태운 검은 재를 얼굴에 바르고 있어서 달이 없던 밤이었으나 대원들의 눈은 희끗거렸다. 소대장과 파견 경사가 대문을 두드리며 물은 직후였다. “○○○씨 계십니까?” 집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유사시’란 말을 한번 더 되새겼다. 병영의 국기 게양대에 검은 리본이 걸렸을 때도 누가 죽었는지 몰랐다. 10월의 하늘에 무심하게 펄럭이는 조기를 보며 아침을 먹고, 오줌을 누고, 오전 훈련을 위해 장비를 점검할 때 내무반 스피커가 대통령의 서거를 짧게 알렸다. 조기가 먼저고 ..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4) 문훈숙 - 공연증후군 문훈숙 |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누군가 내게 수많았던 공연 중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워싱턴의 작은 발레 스튜디오에서의 첫 공연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맡은 역할은 의 오데트도, 의 여주인공도 아닌 탐스러운 긴 꼬리를 가진(두툼한 털옷 때문에 땀을 흠뻑 적셔야 했던) 다람쥐 역할이었다. 발레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맡은 첫 배역이라 토슈즈를 처음 신을 때처럼 굉장히 흥분되고 설렜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 살다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연고도 없는 한국 땅으로 온 열 살 무렵, 리틀엔젤스 예술단에 입단한 나는 비록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순회공연의 경험을 통해 무대의 경건함에 대해 남들보다 좀 더 일찍 눈을 뜨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마냥 신나게 즐기기만 했었다..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3) 이순원 - 등굣길 어머니의 이슬털이 이순원 | 소설가 중학교 때 나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가끔 결석도 하고, 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학교에 가지 않은 날도 많았다. 우선 집에서 학교가 너무 멀었다. 매일 사오리가 넘는 길을 아침저녁으로 걸어다녀야 했다. 몸도 지치고, 학교에 가도 공부하는 재미가 없었다. 마음이 그러니 하루씩 결석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산에 가서 놀다가 점점 더 늘어 아예 집에서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어린 아들이 그러니 어머니로서도 한숨이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얼른 교복을 갈아입어라. 어미가 신작로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그래서 마지못해 교복을 갈아입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머니가 먼저 마당에 나와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전 어머니가..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2) 김형경 - 단체 해외여행 김형경 | 소설가 그것은 나의 첫 외국여행 경험이었고, 그곳은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이었다. 함께 여행하던 일행은 일곱 명이었는데 우리는 독일, 오스트리아를 거쳐 체코로 오는 동안 안내인의 도움을 받으며 줄곧 한몸처럼 움직였다. 프라하 성을 관람하고 카를 다리를 건너오는 동안에도 함께 걸었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이르렀을 때, 시간이 남았는지 안내인은 처음으로 자유시간 30분을 주었다. 도시는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얀 후스 기념상 앞에 서서 한바퀴 둘러보니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간 골목이 대여섯 개쯤 되었고, 골목마다 특색있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든 골목들을 들어갔다 나오기에 30분은 짧은 시간이었다. 레코드와 서점들이 있는 골목에 들어가 집시 뮤직 테이프를 들어보고..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1) 남경읍 - 자만의 대가 남경읍 | 뮤지컬배우 배우를 ‘딴따라’라고 하던 1970년대 후반, 난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세종문화회관 소속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립뮤지컬단)에 입단했다. 고등학교 때는 성악과 진학을 꿈꾸었지만 가정 형편상 레슨을 제대로 받지 못해 결국 포기했다. 책 외판원과 신문팔이, 채소와 과일 리어카 행상을 하면서 겨우 학비를 마련해 재수를 했다. 앞날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산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 연출가의 제안으로 연극을 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대학 연극학과에 진학했다. 연극과 선배들 중에서도 연기보다 피아노 앞에서 매일 노래 연습만 하는 분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면서 ‘뮤지컬’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그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대학 자체적으로 무대에 올린 뮤지컬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의 문화적 ..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0) 심재명 - 지키지 못한 엄마의 마지막 심재명 | 명필름 대표 2006년 4월5일,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하늘은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한 달여의 병원생활을 마친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시는 날이기도 했다. ‘근위축성측상경화증’. 흔히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불치의 병을 얻어 3년 넘게 투병하던 엄마가 급기야 호흡근까지 마비되는 지경까지 이르러 혼수상태로 응급실로 실려 가신 지 한 달. 가족의 허락 하에 목에 구멍을 뚫어 인공호흡기를 달아 생명을 연장하는 시술을 마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시는 날이었다. 매일 중환자실에 들러 엄마의 상태를 보고 가족이 돌아가며 입원실을 지켰던 터라 엄마가 돌아오시는 그 날은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아버지와 올케 언니가 퇴원수속을 밟고 모셔오기로 해서 나는 그냥 회사로 출근했다.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쌀..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9) 배한성 - 대학 1학년 수료 배한성 | 성우 내 또래 세대들은 사내녀석은 절대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중학생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던 나는 어려운 일이 참 많았지만, 울었던 기억은 좀체 없다. 그랬던 내가 그 날은 마구 울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6~7년 전 일이다. 서울예술대학교 겸임교수 임용에 최종학력 증명서가 필요했다. 내가 다녔던 서라벌예술대학교가 중앙대학교로 편입되어서, 서울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 총무과를 찾아가 서류 신청을 했다. 잠시 후 여직원이 서류를 내주면서 팬인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환영해 주었다. 그러면서 “선생님 졸업을 못하셨나요? 방송학과 1학년 수료라고 되어 있네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아, 네네~”만 했다. 그런데 다정도 병이라고 왜 졸업을 안 했느냐, 재수..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8) 안석환 - 나는 한때 똥파리였다 안석환 | 배우 내 나이 서른셋이던 1991년 초겨울의 일이다. 데뷔한 지 5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무명이었다. 당시 나는 이장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영화 에 캐스팅돼 러시아 사할린을 거쳐 일본 삿포로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 영화에서 나는 식민지시대 일본순사 역을 맡았기 때문에 머리를 완전 배코로 밀었다. 지금이야 배코로 미는 것이 개성 있는 패션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배코를 본다는 것은 절간의 스님들이나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 정도였을 것이다. 자정이 훌쩍 넘어 2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인해 나는 거나하게 취한 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새벽 2시까지 운행하는 광화문~원당 좌석버스였다. 막차여서인지 버스 안은 초만원이었다. 나는 고양시 행신동에 살았기 때문에 서울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