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7) 마광수 - 결혼 그리고 결혼식 마광수 | 연세대 교수 60여년이나 되는 삶을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어찌 한 가지만 있을까마는, 딱 한 가지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내가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 거기에 부수되는 문제로서, ‘결혼식’을 올려 많은 하객들에게 불편을 끼친 점을 또한 몹시 후회하고 있다. 내가 결혼한 것은 1985년 12월, 그러니까 내가 서른다섯 살 때였다. 그때만 해도 결혼이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으로 여겨질 때라서, 나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결혼이라는 대사(大事)를 겁도 없이 치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싱글맘’이 생겨날 정도로 독신주의 문화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결혼을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내가 인생을 꽤 오래 ..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6) 이윤택 - 그녀에게 말 걸지 못한 것 이윤택 | 극작가·연출가 현실적인 것들에 관한 한 나는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세상에 몸 섞고 살다 보면 이해되는 것들이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성공이 있고 실패가 뒤따른다. 실패했다고 후회를? 천만의 말씀이다. 실패 또한 삶의 소중한 반쪽이다. 현실적인 것들은 결국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다. 사상이나 느낌 또한 변하고 퇴색한다. 그래서 후회해 본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기억뿐이다. 시간의 흔적 속에 잊혀지지 않고 내 늑골 깊숙이 비밀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 나는 그것을 영혼의 주머니 속에 담겨있는 연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일이다. 나는 생래적으로 운명론..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5) 백기완 - 아, 그 어떤 사랑 이야기 백기완 | 통일문제연구소장 내 한살매라는 게 몽땅 뉘우침의 누더기다. 거기서 바늘자국 하나를 집어낸들 무엇에 쓸까, 그러면서 학림다방에 앉아 멀리 지는 꽃잎을 보노라니 문득 ‘그때 그 녀석은 내가 죽였지’ 그런 죄의식에 오싹한다. 1956년 바로 이 자리다. 6·25 우당(전쟁) 때 부산부두에서 막노동을 같이하던 부두 녀석이 오랜만에 ‘쐬주’ 한잔 하잖다. 더듬한 데서 딱 김 몇 조박으로 ‘막쐬주’ 서너 사발을 꿀꺽꿀꺽, 그런데 누우런 가래를 덤터기로 쏟질 않는가. “야, 너 어디서 무엇을 하는데 그래.” “응, 사람 사는 데서 살지 뭐.” 그러고선 또 게울 때다. 바로 옆에 있는 서울대병원 문을 왕창 부수고서라도 입원을 시켰으면 살릴 수도 있었는데, 그런 성깔을 갖고서도 왜 못했을까. 어리석은 한이 하..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4) 이호재 - 영어를 좀 알았다면 이호재 | 연극배우 1970년대 중반쯤이었나 보다. 그때만 해도 해외 자유여행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외국 여행을 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수속이 복잡했고 신원조회며 재산 정도까지 신고해야 할 판이니 나같은 연극인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속해 있던 극단(동랑 레퍼토리)이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로 공연을 가게 됐다.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동랑 유치진 선생님과 현 서울예술대학의 유덕형 총장의 절대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선 댈러스, 미네아폴리스, 뉴욕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댈러스극장의 후원회원인 어느 미국인 가정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내 후배와 둘이서 공연기간 묵게 되었다. 단독주택 한채였지만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게 출입문도 완전히 나눠져..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3) 김대진 - 시간의 여유 김대진 | 피아니스트 음악인으로서 나의 위치는 비교적 다양하다. 1994년 귀국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개교와 함께, 연주자이면서 교육자라는 역할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그동안 나는 한 학교의 교수라는 직분 외에도 2007년 금호 챔버 소사이어티 음악감독과 2008년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취임해 맡은 책임이 더욱 커졌고 많은 사람의 관심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이러한 나의 변화에 대해 적지 않은 인터뷰를 했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는 가지고 있지만, 음악감독·연주자·지휘자·교육자라는 각각의 역할은 모두 전문성이 요구되는데 왜 이렇게 욕심을 내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여러 역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맞는 말이다. 나는 ‘음악’에 욕심..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2) 김홍탁 - 낯선 자극을 놓친 20대 김홍탁 | 제일기획 마스터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프랑스의 롱샹(Ronchamp) 성당을 두 눈으로 본 것은 내 나이 마흔셋이었을 때다. 마치 동화책에 나올 법한 동그란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동안 로마의 바티칸, 바르셀로나의 파밀리에 성당을 비롯, 한국의 명망 높은 사찰 등 명품이라 칭송받는 웬만한 건축물을 거의 돌아봤지만, 그 건축물들이 웅장하다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건축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는 롱샹 성당이 처음이었다. 이런 세상에…, 건축물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다니…. 그것은 마치 음악도 아닌 미술작품을 보면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그 후로 ‘만약 내가 스무 살 청년일 때 롱샹 성당을 마주했으면 어땠을까’..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1) 이상용 - 남을 돕고 쓴 누명 이상용 | 방송인 나는 열한 살 때부터 아령을 잡고 운동을 했다. 7년 뒤 대전고 재학시절에 미스터 충남에 선발됐다. 그 후 고려대에 입학해서는 역도부에 들어가 미스터 고대에 뽑혔다. 졸업 후 7년간 외판원으로 전전하다가 점쟁이의 말을 믿고 TV에 출연해 건강의 상징인 뽀빠이가 되었다. 다 말할 수 없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난 눈물이 나고 뼈마디가 다 쑤신다. 정말 신물나게 고생하면서 산 기간이었다. 1970년대 중반 KBS TV 로 나는 어린이들의 우상이 됐다. 그 시절 심장병에 걸린 한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찾아왔다. 수술비가 없다기에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다. 수술비가 1800만원이라는 말에 기절할 뻔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 값이 1110만원이었고 나는 사당동 독채 전세 650만원에 살고 있었다...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0) 전무송 - 보신탕 한 그릇 전무송 | 연극배우 사춘기 무렵, 역사 속 위대한 영웅들의 행적을 전설 혹은 책을 통해 만나며 내 미래를 짧고 굵직하게 가리라 정하고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그렸다. 그러나 차츰 삶이라는 현실 앞에 그 영웅적 꿈은 눈 녹듯 사라졌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연극학교에 입학했다. 그것이 적성에 맞았던지 생(生)을 걸게 되고 차츰 그 세계에 빠져버렸다.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어 안갯속 같은 미래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집에서 독립을 하겠다며 나왔지만 방 얻을 돈이 없었다. 학교 계단 밑 쪽방 같은 빈 사무실에서 책상, 걸상을 침대삼아 지냈다. 끼니는 건너뛰거나 하루에 한 번 중부시장의 막국수 한 그릇으로 때우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이 술 한잔 살 땐 “밥 사줘”라는 ..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49) 김정운 - “고려대로 가주세요” 김정운 | 문화심리학자 “어디로 갈까요?” 택시기사는 내게 물어봤다. 택시 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결정하지 못했다. 어디든 말해야 했다. “안암동 고려대학교로 가 주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한마디다. 1980년도 겨울이 시작되던 어느 날 이야기다. 이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내 인생은 오늘날까지 형편없이 꼬이게 된다. 갑자기 본고사가 폐지되고, 예비고사와 내신성적만으로 대학입학이 결정된다고 했다. 몇 개 대학이든 서류지원이 가능했다. 재수를 했던 난 두 군데에 지원했다. 연세대학교 공과대학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원래 난 이과였다. 건축과를 가고 싶었다. 그 당시 연속극의 주인공은 다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동건설 바람이나 국내 강남개발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난 폼 나는 건축사..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48) 최백호 - 스물아홉 홀어머니의 소원 최백호 | 가수 예전에 ‘미련도 후회도 없다’는 유행가가 있었다.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친구들이랑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목을 쥐어짜 소리치던 노래였다. 그런 노래를 어릴 적부터 불러댔던 덕분인지, 아니면 천성적인 단순한 뇌구조 때문인지 나는 내가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해 그야말로 한 점의 미련도 후회도 없다. 그렇다.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미련스럽게도 참으로 건강하다. 그래도 뭔가 후회되는 일이 있을 거야 하고 굳이 찾아봐도, 나의 기형적인 짧은 기억력으로는 생각해낼 기억들이 별로 없다. 다만 외동아들 손잡고 나들이 한번 가고 싶어 하셨던,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그 작은 소원 한번 못 들어드린 일, 대입 예비고사를 보다가 점심시간에 ‘이게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그냥 나와 ..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47) 최열 - 20년 전 성금, 그분은 누굴까 최열 | 환경재단 대표 지금은 쓰레기 종량제를 실시해 종이와 플라스틱, 병, 음식물 찌꺼기를 분리수거하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런 제도가 없었다. 아파트에는 층마다 쓰레기 투입구가 있어 투입구에 형광등, 플라스틱, 건전지, 음식물 찌꺼기 등을 그대로 버렸다. 이 쓰레기는 모두 1층으로 떨어져 1층에 사는 주민들은 바퀴벌레와 악취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다. 그래서 1층 아파트는 집값도 쌌다. 식당에서도 1회용 나무젓가락을 한 번 쓰고 버렸다. 당시 소설가 이외수씨는 나에게 ‘쓰레기란 인간이 남긴 욕망의 흔적’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1988년 도쿄에서 열린 세계환경회의에서 인도네시아 대표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 나라는 우리나라 나무를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이 수입한다. 한국에서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사.. 더보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46) 김운경 - 왜 깨끗한 껌을 골랐을까 김운경 | 방송작가 십여년 전,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이 만개하여 인파로 붐빌 때의 일이다. 당시 고 박영석 대장의 원정대를 따라 시샤팡마라는 티벳의 산에 갈 기회가 있었다. 물론 정상 등반은 어림없고 베이스캠프까지만 따라가는 조건이었다. 잔뜩 들뜬 나는 원정대 사무실을 가려고 SBS를 나와 여의나루역으로 향했다. 허나 어이없게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순복음교회 지하도 쪽으로 가고 말았다. 지하도 근처에서 서성이며 몇몇 행락객에게 여의나루역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였다. 지하도 입구에 앉아 나를 올려보고 있던 청년이 힘겹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는 껌을 파는 지체부자유 청년이었다. 그의 앞에는 누런 박스가 깔려있었고 그 박스 위에는 껌 10여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 여의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