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21) 신율 - 사춘기에 접은 가수의 꿈 신율 |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뭘 적을까 정말 고민 많이 했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후회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후회들은 자신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소심하고 결단력 없는 성격 때문에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들을 접은 적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어릴 적부터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접은 것은 나의 소심함과 젊은이답지 않은 ‘영악함’ 때문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나는 본래 가수나 대중음악 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지금의 직업 혹은 활동 영역과 너무 다르지만 어릴 적부터의 꿈은 정말 대중음악을 하는 거였다. 내가 방송에 첫 번째 출연하게 된 계기도 이런 내 꿈과 무관하지 않다. 초등학교 시절 KBS에는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 더보기
(20) 김동수 - 가지 못한 기업가의 길 김동수 |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는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선택하지 못한, 또 다른 삶의 행로에 대한 애틋하고 아쉬운 마음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할 것이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내게도 그런 가지 못한 길이 하나 있다. 바로 ‘기업가의 길’이다. 젊은 시절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나 결국 가지 못한 길이 되었기에 지금도 마음 한편에는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 많다. 기업가는 희박한 성공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도전을 통해 목표를 성취해 가는 사람이다. 조지프 슘페터와 같은 사람은 기업.. 더보기
(19) 현오석 - 아이들 교육 일관성 있었나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꾸지람을 들으며 자라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가정과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이러한 행동패턴 속에서 교육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그런 대로 자기 앞가림을 한다고 생각되지만 지난 세월을 돌이켜볼 때 나의 이러한 자녀 지도방법이 과연 옳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아이가 부모 말을 잘 따르고 지시대로 행동하면 칭찬해주고 그대로 하지 않으면 잔소리를 하는 일이 되풀이되었지만 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지났다. 아이들은 혹시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엄마와 아빠는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아이’를 원하니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나 같은 것은 필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 더보기
(18) 김선수 - 왜 그렇게 어울리지 못했나 김선수 | 민변 회장 내가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까지 살았던 고향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포장도로도 없어 차가 들어올 수도 없었다. 학교에 도서관도 없어서 읽을 책도 거의 없었다. 6학년 여름방학 때 나 혼자 의정부 작은 집으로 나왔다. 중학교 1학년 6월쯤 부모님이 고향 살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나도 서울로 전학했다. 나는 도회지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이곳 아이들의 생활은 나와는 너무 멀게만 느껴져 같이 어울릴 수가 없었다. 맘에 맞는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 교회에도 나가봤지만 거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옆자리의 짝과 1년간 한마디도 못했다. 짝도 나와 성격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당시 나는 사회에 적응해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보기
(17) 공병호 - 위기 때 흔들린 마음 공병호 |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큰 후회는 없다. 왜냐하면 늘 준비했고, 늘 위험을 감수했고, 늘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따금 ‘불가피했지만 그건 실수야’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사건이 있다. 40대를 전후해 연구소에서 사업을 위해 전직을 했지만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는 경험을 했다. 더 솔직하자면 실상은 실패라는 이름을 붙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기에 처하게 됐다. 2년 정도의 참담한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과제를 앞에 두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경험할 즈음이다.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던 시기였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 머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난 다음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10년 이상의 교분.. 더보기
(16) 박경철 - 아버지의 건강검진 박경철 | 의사·경제평론가 어느 해 추석직전 벌초길에 할아버지 산소에 들렀을 때, 절을 마친 아버지가 “너도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성인이니, 이번 추석에는 네가 주도해서 차례를 한번 지내봐라”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별 다른 뜻 없이 받아들였으나, 이어서 “만약 아버지가 죽으면 네가 장남이니 스스로 차례도 지낼 수 있어야 하는 거다”라고 하시는 바람에 그 순간 불편한 마음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라 무심하게 넘어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요즘 뒷골이 자주 당기고 가끔 어지러운데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라고 하셨을 때, 집에 있던 실습용 혈압계로 혈압을 잰 다음, “혈압은 괜찮으신데 너무 무리하시니까 그렇죠. 야근도 잦고”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 더보기
(15) 신헌철 - 무모한 3수, 해병대 34개월 신헌철 |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 절기가 상강(霜降)을 지났다. 가을걷이 끝난 빈 밭에 무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성황당 감나무 끝에 매달린 붉은 홍시 몇 알을 두고 까막까치 우짖는다. 이때부터는 넉넉하던 가을도 차오르는 즐거움보다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으로 공허해지고, 괜히 서글픈 느낌이 많아진다. 한 해의 성공보다 실패가 더 두려웠던 사람들에게 가을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다. 고교나 대학교 졸업반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상급학교 진학과 취업 준비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게다. 1963년 10월 상업고등학교의 졸업반이었을 때나 1971년 10월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가 꼭 그런 느낌이었다. 고졸 은행원이 되려고 상업고등학교에 갔으나 주위에 적절한 멘토가 있을 수 없는 형편에 혼자만의 생.. 더보기
(14) 오현경 - 광고출연 ‘0’ 1961년 12월 KBS TV가 개국하면서 TV 드라마는 거의 대부분 학생극 출신의 젊은 연극인들이 관여했다. 연출하는 이는 직원으로, 배우들은 출연자로 나섰다. 그 당시 탤런트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극단에 들어간 곳은 거의 모두 나처럼 학생극 출신의 선후배가 모인 동인제 극단이어서 출연료는 고사하고 공연 제작비를 마련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방송에서 출연료를 주니 그걸로 생활하면서 연극을 하자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1964년 동양방송(TBC TV)이 상업방송으로 개국하면서 대다수 사람들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TBC TV는 송출범위가 서울·인천 주변과 부산·마산 주변 지역에 한정됐지만 상업방송이어서 그런지 인기 드라마가 생기고 인기 탤런트(이 무렵부터 .. 더보기
(13) 박동규 - 한마디 말 때문에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김장철이어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버스 정거장 세 곳을 지나야 있는 시장에 갔다. 시장 입구에 배추들이 마치 무덤처럼 산같이 차곡차곡 열을 지어 쌓여있고 무 들도 길 양편에 내 키 높이보다 높게 벽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배추 값을 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배추포기를 들어 속을 살피기도 했다. 김장시장을 한 바퀴 다 돌아다녀 봤지만 어머니는 어떤 것을 사겠다는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라 가마니를 펴서 이불처럼 배추를 덮는 이도 있었다. 어머니는 두 시간 넘게 김장시장을 돌다가 내 손을 잡으며 그냥 가야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나는 빈손으로 버스정거장 세 곳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 더보기
(12) 한경희 - 너무 늦어버린… 사랑합니다 한경희 |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1986년 겨울 나는 잿빛이 가득한 스위스 하늘 아래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무국에 취업했고, 기대에 부풀어 한국을 떠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IOC 업무는 생각보다 무료했다. 동료들은 작은 체구의 동양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장밋빛일 줄 알았던 스위스의 겨울은 생각보다 춥고 음산했으며 외로웠다. 그때 내 품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보낸 편지였다. 낯간지러운 미사여구 없이, 단지 ‘사랑한다’란 한마디만 적혀있는 편지였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 속의 한마디는 백마디 말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내게 있어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였다. 일평생을 교육.. 더보기
(11) 이만열 - 아내의 진학을 막다 이만열 | 숙명여대 명예교수 팔불출 하면 몹시 어리석은 사람을 이른다. 때로는 팔불취(八不取), 팔불용(八不用)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거의 자식이나 마누라 자랑을 할 때 사용된다. 국어사전에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우리 아들 자랑 좀 해야겠다”라든가, “팔불취가 아니고서야 자기 아내 자랑을 그렇게 하겠어?”라는 예문(例文)까지 등장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팔불출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맨입으로는 내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를 말하자니, 아예 팔불출로 자처하고 꺼내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다. 그 ‘한 가지’는 약 35년 전 아내가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말했을 때 흔쾌히 동의하지 못한 것이다. 결혼 초부터 나는 아내더러 대학원에 진학.. 더보기
(10) 이만기 - 하필 왜 씨름을 했던고 이만기 인제대 교수·씨름인 이 얘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들이 많겠지만 난 씨름한 것을 후회한다. 혹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다음 생에는 샅바를 잡지 않을 것이다. 씨름을 통해 난 많은 것을 얻었다. 프로씨름 원년인 1983년, 겨우 대학교 2학년 때 초대 천하장사 자리에 올랐고 이후 10년 가까이 온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한때는 탤런트 현빈만큼이나 인기가 있었고 연예인, 운동선수 통틀어 연간 소득 1위에 오른 적도 있을 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모두 씨름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씨름을 시작한 것을 후회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갔던 특별활동반이 왜 하필 씨름부였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운동선수, 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