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9) 문용린 - 월급봉투와 어머니 문용린 | 서울대 교수·전 교육부 장관 지내놓고 보니 어머니께 잘못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차로 두 시간이면 닿는 시골에 사시던 어머니를 1년에 고작 두 번 추석과 설날에만 가 뵙곤 했던 것을 후회한다. 멀미로 차를 못 타신다는 것을 핑계로 평생에 한번도, 내 차에 모시고 가까운 온천 한번 안 다녀온 것도 후회한다. 5년 가까이 미국에 유학해 살면서도 어머니를 모셔와 구경 한번 시켜드리겠다는 생각조차 못한 것을 정말로 후회한다. 어머니는 서른에 날 낳으셨다. 위로 12살 차이가 나는 형이, 아래로는 네 명의 동생이 더 있다. 합쳐서 6남매를 모두 잘 키우시고 그 아래 손주까지 다 보시고, 88세 되시던 해 화창한 어느 봄날 새벽에 돌아가셨다. 거친 만주 벌판의 도시 푸순에서 자라, 16살에 우리 아.. 더보기
(8) 김창완 - 늘 못마땅했던 나 유난히 키가 작았던 나는 등굣길에 놀림을 받았다. “가방이 땅에 닿을라고 그런다. (가방이) 창완이를 학교 데려다주는구나.” 그렇게 놀리는 동네 할머니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걸어가며 나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저 쭈그렁바가지 할멈 거울 속에는 아마 달걀귀신이 들었을 거야. 그리고 그 달걀 안에는 새카만 고양이가 있지. 그 고양이는 나 같은 애들을 골탕 먹이려고 늘 엿보고 있지…. 나는 저 할멈 속에 고양이가 있는 걸 알지.” 놀림을 당할 때마다 나도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그 할머니보다 키가 더 컸던 기억은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늘 키가 작았고 그게 불만이었다. 키가 작으면서도 생쥐같이 동작이 빨라 축구도 잘하고 달리기도 큰 애들한테 뒤지지 않는 애들도 있었는데, .. 더보기
(7) 김명곤 - 죽음의 균과 보낸 15년의 청춘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 꿈 많은 19살, 나는 최고의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서울대 사대 독어과의 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나의 꿈은 현실의 벽에 부딪쳐 표류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학비와 숙식을 해결하느라 서울의 최하층 유랑민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으로 얼굴 아는 친구나 선후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간제 그룹지도도 하고, 개인 지도도 하고, 입주해서 먹고 자며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2학년 봄에 우연히 연극반 연습실에 놀러 갔다가 배우 한 사람이 안 나와 대본을 대신 읽어준 계기로 사대연극반원이 되고 말았다. 그 뒤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연극반의 분위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연극에 .. 더보기
(6) 이영하 - 눈앞에서 놓친 올림픽 금메달 이영하 | 빙상인 지금도 올림픽만 생각하면 가슴속 진한 아쉬움이 다시 떠오른다. 벌써 35년 전 얘기다. 나는 1976년 이탈리아 마도나 디 캄피그리오에서 열린 세계주니어 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종합 2위는 미국의 신예 에릭 하이든이었다. 그는 4년 뒤인 1980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5관왕에 오르며 올림픽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어쨌든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1500m를 제외한 500m와 1000m, 5000m, 1만m 모두 하이든을 이겼으니 체육계에서 내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에서 내가 금메달은 아니더라도 한국 체육 사상 첫번째 동계올림픽 메달을 거머쥘 것으로 예상했다. 1979년 노르웨이 오슬로 세계선수권대회 500m에서 .. 더보기
(5) 이지성 - 나만을 위한 읽기와 쓰기 이지성 | 작가 나는 나 자신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거의 매일 몸이 부서져라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오직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나는 작가로 성공하고 싶었고 소위 유명인사가 되고 싶었다. 내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스물여덟 살 때부터다. 당시 나는 수억원에 달하는 보증빚을 진 채 성남시 빈민가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그리고 경험했다.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 빈민의 삶을. 아니 부도덕한 지배계급이 만든 악한 사회 구조를. 자기계발서를 읽는 태도가 바뀐 것은 그 무렵부터다. 그 전의 나에게 있어서 자기계발서란 지친 마음의 충전기에 불과했다. 허나 사회의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니 자기계발서가 마치 어떤 구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목숨 걸고 자기계발서를 읽기 시작했고.. 더보기
(4) 신달자 - 감정이라는 유령의 덫 신달자 | 시인 불현듯 소용돌이치며 감정이 솟구쳐 올라 벽에 머리를 찧고 싶은 순간이 지금이라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의 빗이 그 감정의 파도를 잘 빗겨내려 이내 고요해지는 것을 나는 느낀다. 그것을 사람들은 나이라고 말해준다. 그렇다. 나이 덕일 것이다. 내 어머니는 칠순이 가까워질 때까지 “마음은 청춘”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이 처음에는 힘이 있다가 차츰 말끝에 힘이 빠지고 있음을 알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나이를 되짚어 살아오면서 그것이 황당한 거짓말이라고 믿었던 나의 확신이 풀리고 “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살아왔다고 해야 옳다. 나이만큼 마음이 늙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아프게 경험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과 나이의 거리가 또 하.. 더보기
(3) 박승 - 어머니 모시기 박승 | 전 한은총재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다. 나는 나를 무한히 용서하고 사랑한다. 나는 나를 속이는 일도 없다.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하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을 일심동체라고 말한다. 자식의 부모 사랑도 마찬가지다. 분신(分身)인 자식이 부모를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의 아픔은 나의 아픔, 부모의 기쁨은 나의 기쁨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은 부모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나를 위한 것이다. 효도한다는 것은 부모를 통해서 나의 행복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긍지와 행복이 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어느 땐가 후회하게 마.. 더보기
(2) 안성기 - 악기 하나 다룰 줄 알았더라면 안성기 | 영화배우 배우로서 작품을 끝내고 나면 늘 만족감보다 아쉬움과 후회가 따릅니다. 이 때의 후회와 다짐은 다음 작품을 위한 밑거름이 되지요. 그럼에도 미흡함을 깨치고 뉘우치고 마음을 다잡는 과정은 작품을 마칠 때마다 반복됩니다. 주위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도 당사자의 눈에는 부족하거나 넘쳐보이는 게 어떤 작품에서든 있게 마련이거든요. 성인으로 출연한 장편 극영화가 (1977)부터 개봉을 앞둔 까지 모두 일흔여덟 편입니다. 간혹 예전 출연작을 다시 볼 때에 ‘눈빛을 조금만 더 누그러뜨렸더라면…’ 등 모르고 있다가 새삼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출연작 중 영화 외적으로 후회막급인 작품은 (2002)입니다. 피아노 등 악기 연주 실력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맡은 대통령은 인사.. 더보기
(1) 엄홍길 - 셰르파의 죽음 엄홍길 | 산악인 1986년 겨울, 히말라야에서 에베레스트와 맞서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 근육은 단단했고, 힘줄은 팽팽했다. 서울 도봉산 아래서 태어나 밥먹듯이 산에 오르며 자랐으니 산에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등반기술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한국 최고라고 생각했다. 절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에베레스트 남서벽도 충분히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1985년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가 한 번 실패했지만 두 번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정상 등정 없이 빈손으로 귀국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해외여행 자체가 특권이던 시절, 한 번 히말라야에 온다는 것은 집을 팔든가 아니면 전세방이라도 빼야 가능할 만큼 목돈이 들었다. 그 시절 산악인이라면 정상공격조가 아니라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