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33) 김동규 - 허송세월한 예과 2년 김동규 | 서울대 의대 교수 학교 정문에서 어린이 키만한 몽둥이를 들고 복장을 검사하는 호랑이 훈육주임 선생님도 안 계셨다. 수업도 하루에 서너시간밖에 없었다. 세상 사는 맛이 났다. 대학입시 준비로 찌든 고교 3학년 생활과는 비교도 안되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예과 때 놀지 않으면 평생 후회가 될 테니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배웠다. 교가는 몰라도 되지만 ‘예과 노래’는 꼭 알아야 한다며 “노세 노세 예과 때 놀아, 본과 가면 못 노나니…”라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예과란 의예과이고 본과는 의과대학을 뜻한다. 해방감과 성취감에 한껏 들뜬 스무살도 안된 어린 학생의 가슴에 그대로 녹아드는 감미로운 유혹이었다. 수.. 더보기
(32) 이영탁 - 어디서 고향을 찾을까 이영탁 | 세계미래포럼 회장 해마다 11월 중·하순이 되면 시제를 지내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올해는 유독 가슴이 무거웠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이 사라질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20여가구가 모여 오순도순 살았는데 지금은 한 집밖에 없다고 한다. 그 집도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을. 그렇게 해서 고향마을이 없어지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그리운 것이 많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리움이 더해지는 것 같다. 철없이 보낸 어린 시절, 같이 놀던 친구들도 그렇고, 어렵게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가 그립다. 돌아가신 부모님, 조부.. 더보기
(31) 이정우 - 조기 취학 이정우 | 경북대 교수 내 인생에 후회되는 한 가지를 쓰려고 되돌아보니 후회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열 가지, 스무 가지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중 한 가지만 써보려 한다. 어릴 때는 밖에 나가 동네 아이들과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의병놀이, 소타기, 말타기로 하루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런데 골목에서 놀던 애들이 하나둘 입학하고 나니 같이 놀 아이들이 없어졌다. 골목이 썰렁해지면서 심심하기 짝이 없게 됐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있을 것 같아 부모님을 졸랐다. 그래서 취학연령이 안됐는데 한 해 일찍 입학했다. 지금 같은 대명천지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세상이 어수룩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초등학교에 원서를.. 더보기
(30) 정경화 - 아들과의 연주 거절 정경화 | 바이올리니스트 올해 6월 어머니를 뉴욕 퀸스 묘역에 있는 아버지 옆에 모시면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첫째아들 재곤이는 외할머니를 위해 나의 줄리아드 음악학교 제자들과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준비했다. 재곤이가 어머니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재곤이는 음악에 특별한 재주를 타고났다. 음악성이 뛰어나서 어려서부터 재곤이가 내는 피아노 소리는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우리가 그랬듯이 재곤이의 타고난 재주도 어머니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궁리를 하셨던 모양이다. 2003년 3월 나의 55세 생일을 맞아 어머니, 큰 언니(명소)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일주일을 잘 지내고 마지막 날이었다. 어머니께서 조심스럽게 재곤이의 피아노 반.. 더보기
(29) 조유전 - ‘발굴’ 이라는 업보 조유전 | 고고학자 후회라? 원고청탁을 받고서 일생을 살면서 ‘내가 과연 후회했던 일이 무엇인가’를 반추해보았다. 글쎄 사람이 태어나서 평생을 살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던가. 그것이 짧은 인생의 길이든, 긴 인생의 길이든 관계없다. 생을 마치면 한줌의 재가 되어 뿌려지거나 아니면 땅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지 않나. 사람은 사람일 뿐 신이 될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나서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화내면서, 그리고 때로는 즐겁게 살아간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어쩌면 특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면서 뒤돌아보면서 자신이 했던 일을 반성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후회도 한다. 이것 역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하기야 후회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 뜻에서 필자는 평생을 .. 더보기
(28) 윤후명 - 이별 연습 “어떡하니….” 어머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에 내 귀는 먹먹해지고 가슴은 막막해진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방법이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닥쳐오는 마지막 순간에 대한 속수무책의 말. 근본적인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없는, 말하자면 삶과 죽음의 ‘어떡하니’. “어떡하니….” 나를 들으라고 하는 말일까. 그러나 나는 그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그 말은 후회의 뜻하고도 거리가 멀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야만 후회는 성립한다. 내 젊은날의 노트에 써놓은 ‘후회는 없다’. 무슨 신파처럼 읽히는 그 문장을 나는 되뇌면서 여기에 이르렀다. 내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 나중에 결코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정말 그러할 것인지에 대해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후회는 없.. 더보기
(27) 정민 - 영어 공부 정민 | 한양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럿거스 대학에 방문학자로 갔다. 집이 프린스턴시에 있었기 때문에 근처 프린스턴 대학 도서관에서 작업을 주로 했다. 한번은 세미나 공고가 붙었다. 제목이 ‘털난 야만인’이었다. 19세기 일본 회화에 갑자기 많이 등장한 털북숭이 야만인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미국 내 다른 대학에서 온 중년의 백인 교수는 그림 자료를 띄워가며 호들갑스럽게 발표했다. 그림 속의 털난 야만인은 누가 봐도 매부리코를 한 서양인이었다. 그가 갑자기 군관 복장을 한 수염 많은 조선 통신사 그림을 잇달아 보여주더니, 일본 회화 속의 야만인의 정체는 서양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단정짓듯 말했다. 분기가 탱천했다. 저런 미친 자가 있나? 하지만 한마디도 못했다. 다행히 그의 주장.. 더보기
(26) 한승원 - 원양어선을 끝내 못 탔다 한승원 | 소설가 한반도 남단 다도해 지방의 섬에서 나고 자란 나는 먼 바다, 태평양 대서양 등의 해양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의 3년 동안 나는 아버지 밑에서 김(海苔)양식을 하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린 시절에 내 고향 덕도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신비한 세계였다. 바다 속의 섬에서 안주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세상에서 갇혀 사는 것이고, 그 섬을 벗어나 육지로 나가는 것은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섬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가 나를 육지의 학교에 보낸 것은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나에게 시를 쓰고 싶어 하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원양어선을 타러 가겠다고 했다. 친구는 바다 모험과 문학적인 경험과 취직 .. 더보기
(25) 정이만 - 어릴 적 어떤 거짓말 ㆍ정이만 한화63시티 대표 결혼한다고 인사 오는 직원들을 만나면 나는 인생의 선배로서 결혼생활에 꼭 필요한 몇 가지를 얘기해주곤 한다. 그 중 하나가 배우자의 어릴 적 얘기를 많이 들어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릴 적에 형성된 트라우마가 있기 마련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어릴 적에 어떻게 살았고 받은 상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상처가 지금의 상황이나 성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아는 것이 좋다. 그래야 설령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그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해 못하고 상대방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하게 싸움이 전개되기 일쑤이다. 나는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미술시간에 .. 더보기
(24) 조수미 - 가족과 함께 못한 시간들 조수미 |성악가 국제 무대에 데뷔한 지 벌써 25년이 흘렀다. 무대는 1986년 6월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 있는 베르디 극장이었다. 오페라 에 등장하는 청순가련하고 헌신적인 소녀 질다 역이었다.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게오르그 숄티, 주빈 메타, 로린 마젤, 제임스 레바인과 같은 마에스트로들과 함께 공연했다.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 런던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같은 세계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 무대에 올랐다. 국내외에서 30여종의 음반을 내고 지금까지도 한 해의 대부분을 오페라와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데 쓸 정도로 바쁘다. 지난 25년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앞만 바라보며 치열하고 도전적인 과정을 걸어온 듯 하다. 기교.. 더보기
(23) 김인식 - 세계야구 한·일 결승전 2009년 3월2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많은 팬이 기억하듯 미국 현지시간으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일본의 결승전이 열렸다. 그리고 또 많은 팬이 기억하듯 연장 10회초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에게 결승타를 맞았다. 중요한 순간 복잡한 결정을 해야 했다. 양상문 코치를 통해 임창용-강민호 배터리에게 ‘거르라’는 사인을 냈다. 이치로와 승부하기 직전 양 코치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메이저리그 구장은 한국과 달리 더그아웃 안에 감독의 의자가 있는 게 아니라 낮은 철망이 있어서 거기에 기대 경기를 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양 코치에게 “사인 전달하고, 선수들이 받았나”라고 물었다. 양 코치가 “확실히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어쩌면 그게 내 잘못이었다. .. 더보기
(22) 손숙 - 스물한 살의 결혼 손숙 | 전 환경부 장관·연극인 나는 21살 대학교 3학년 때 결혼했다. 오직 사랑 하나만 붙들고 우리 엄마의 엄청난 반대에도 꿋꿋하게 맞섰다. 그냥 내 눈앞에 보이는 그 남자 한 사람만 보고서 참 용감하고(?) 무모한 결혼을 감행했다. 그때의 내겐 미래가 암담했었고 아무런 확신도 없었으며 집안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오랫동안 아버지는 소식조차 없었고 무조건 자식들은 서울가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무모한 상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엄청 힘들었고 그 때문에 식구들은 모두 서로를 증오하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그 집구석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마침 만난 남자랑 사랑에 빠진 터라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그곳도 낙원은 아니었다. 나는 그 남자가 나의 힘들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