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버닝’의 종수에서 포크너의 소년 사티를 보다 사티는 아버지가 두렵다. 싫다. 답답하다. 밉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집에서만 대장이다. 사티를 때리고, 어머니를 밀어붙이고, 함부로 대한다. 그런데 집을 벗어나면 가난한 소작농에 상습 방화범이다. 아버지는 수가 틀리면 불을 지른다. 우리가 없는 아버지의 돼지는 걸핏하면 남의 집 농장을 침범한다. 이웃은 그렇게 침범한 돼지를 잡아두곤, 돈을 내야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장작이랑 건초는 불에 타는 물건이다’라는 전갈을 보낸다. 그리고 그 집 헛간이 불탄다. 치안판사는 아버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마을을 당장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떠나온 아버지는 사티에게 거짓말을 요구한다. 사티는 정말 싫다. 정직하게 살고 싶고, 좀 더 우아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 더보기
‘위기의 주부들’과 그 자매들 여성을 주 제물로 삼던 스릴러 장르에 최근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눈길을 끈다.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김희선, 김선아 주연의 를 비롯해, 올해 김남주에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JTBC 드라마 , 한가인의 6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OCN , 송윤아와 김소연의 ‘워맨스’를 내세운 SBS 등 여성 중심 스릴러가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특히 기혼 여성들의 억압과 불안을 극의 중심 재료로 삼는다. 하나같이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서사인 미국드라마 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는다는 점에서도 그 공통된 정서를 알 수 있다. 미국 중산층 주부들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그린 은 기혼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통해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파헤쳐 방영 당.. 더보기
가정의달, 가족의 영화 5월은 가정의 달이라더니, 영화관에도 가족이 많다. 관객도 많지만, 가족에 대한 영화들이 많다는 뜻이다. 미국으로 입양된 후 팔씨름 챔피언이 된 마크의 이야기인 , 아내와 사별한 후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온 아버지 귀보의 이야기 를 비롯해 때마침 소개된 인도 영화 도 넓은 의미에서는 가족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가족 이야기가 대부분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와 은 공교롭게도 모두 레슬링을 소재로 삼고 있다. 는 레슬러로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레슬러 아버지 귀보는 유해진이 맡아 특유의 너털웃음과 사람 좋은 말투로 그려진다. 어쩌면, 라는 영화가 유해진의 개성과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더보기
어벤져스의 농담 가 개봉했다. 한국이 첫 개봉이다. 원산지인 미국보다 하루 더 빨리 한국 시장에 풀린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한국을 첫 개봉지로 선택한 지는 꽤 되었다. 두 번째 편이 아시아 정킷을 서울에서 하면서 시작된 변화는 어느덧 한국 최초 개봉의 기시감으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한국 시장이 중요시되는 셈이다. 수적으로 보면 고작 1000만 안팎이지만 한국 시장이 중요시되는 이유에는 여러 맥락이 있다. 아마도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 관객들의 적극성이 아닐까 싶다. 가 개봉한 25일(수요일) 하루 내내 검색어 상위에 이 영화 제목이 머물렀다. 민감했던 정치적 뉴스나 얼마 남지 않은 남북대화 이슈도 제치고 상위에 랭크된 것이다. 말하자면, 뉴스에서는 종일 선거나 북한 이야기를 하지만 SNS에서는 이.. 더보기
‘엄마’와 멜로드라마 얼마 전 종영한 텔레비전 드라마 는 ‘엄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대개 ‘엄마’를 낳아 준 여자로 여긴다. 하지만 드라마 에는 낳아 준 엄마도 등장하지만 방점이 찍힌 건 키워 준 엄마들이다. 낳지 않은, 생물학적으로 무관한 엄마들이 오히려 더욱 엄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육원에서 주인공 수진을 입양한 여배우 엄마, 학대당하는 아이를 품은 엄마. 두 엄마는 모두 친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만나, 그 ‘딸’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전폭적으로 헌신한다. 드라마 는 어떤 점에서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아름다운 결말을 훼방놓는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로맨스에서 양가 집안의 반대나 불치병 같은 게 그 장애물이라면 에서 장애물은 법이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수진은 아.. 더보기
‘82년생 김지영’과는 정반대 묘사 조남주의 소설 은 인격화된 보고서이다. 김지영이 갑자기 빙의 증세를 나타냈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내용이 연대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사회학적 가치가 더 높은 책이다. 문학적으로 따지자면, 김지영의 삶은 문제적이며 전형적이라기보다는 기획적이다. 작위적인 부분도 있고, 인물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어긋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은 39년생 윤덕수의 삶을 그린 윤제균 감독의 영화 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김덕수에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들이 개인사로 스쳤듯이 82년생 김지영에게 또래 여성들이 겪었을 만한 일들이 모두 다 일어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문제적인 것은 그런 김지영에게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다는 사실이다. 이 공감은 김지영이 경험했던 모든 일들.. 더보기
우아함, 그리고 옷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대가를 내 생에 지불해야 이처럼 모든 남루한 디테일을 제거해 버린 고급하고 단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정미경의 소설 의 주인공 여자는 지금 “물빛을 연상시키는 푸른 스트라이프 셔츠의 가슴께를 손등으로 가만히 쓸어보”고 있다. 그녀는 진열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옷들을 구경한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은 과도한 장식을 배제한, 우아한 옷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에는 731벌의 고급 부티크 옷을 남긴 채 죽은 여자가 등장한다. 가격표도 뜯지 않은, 아름다운 옷들을 남긴 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희한한 이름을 가진 토니 타키타니는 키 165, 발 사이즈 230, 옷 2사이즈를 입는 여성을 구해 아내의 옷을 입고 지내주길 요청한다. 그렇게 옷을 입어보던 여성은 .. 더보기
가만히 있지 않는 것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작인 와 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우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여성 주인공 영화가 처음이겠냐마는, 말 그대로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끄는 여성 인물 영화는 오랜만이다. 두 작품 모두 그렇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가진 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딸아이를 강간살인사건으로 잃은 어머니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나 냉전시대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말 못하는 여성 엘리사(샐리 호킨스), 그들 모두 약자이다. 물리적으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두 여성 인물은 모두 ‘을’에 가깝다. 딸아이의 죽음 이후 범인을 찾고 싶지만 사건은 일 년이 지나도록 흐지부지 해결될 기미가 없다. 옆집에 사는 이웃의 숟가락 개수도 헤아릴 만큼 작은.. 더보기
그는 상습범이다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조개를 참 좋아하나 봐요. 난 다른 조개 먹고 싶은데.” “저기 가서 키스만 하고 갈래요?” 만약, 처음 만난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까? 게다가, 그 남자와 여자가 직무상 상하관계에 놓인 입장이라면 말이다. 남자는 교사이고, 여자는 그에게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생이다. 영화 (2005)의 유명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재림 감독의 의 앞부분을 보자면, 모든 게 교과서적이고 또 뻔하다. 다른 여자 교생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교생이 있다. 게다가 예쁘다. 그녀를 담당하게 된 교사는 우선 술 한잔하자고 권한다. 거절당한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든 우리나라엔 ‘회식’이라는 문화가 있다. 드디어 첫 번째 회식이다. 회식.. 더보기
드물어진 유괴, 흔해 빠진 변형들 리들리 스콧의 영화 는 유괴사건을 다루고 있다. 유괴하면, 왠지 어린아이와 연루된 사건만 떠오르지만 한자의 뜻답게, 유괴(誘拐)는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잡아 억류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가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폴 게티의 손자 유괴사건을 다루는데, 그 손자가 18살의 남자아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개 유괴사건은 돈 때문에 발생한다. 게티 3세가 유괴당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 부호의 손자이니, 몸값 1700만달러 정도는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돈을 요구한 이탈리아 시골의 갱단보다 그 돈을 주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게티 할아버지가 더 잔혹하게 여겨진다. 손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돈보다는 덜 사랑하는 게 계속 입증되니 말이다. 영화사.. 더보기
영혼을 위한 여행, 기억을 위한 죽음 사람들은 삶을 무척 사랑하나 보다. 죽음 이후에도 이곳과 닮은, 어떤 시공간을 상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49재나 천국, 저승과 같은 단어들 속에는 죽고 난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믿음들이 영화나 소설,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영화 가 그렇고, 골든글로브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한 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작가 위화 역시 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을 그려내고, 아주 오래된 문학작품인 단테의 에도 삶과 죽음 사이의 경유지가 등장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거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는 죽은 다음날부터 시작된다. 이곳에는 우리로 치자면 저승차사와 비슷한 관리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이제 막 죽어서 삶을 떠난 이들을 완전한 죽음의 세계.. 더보기
권선징악을 팝니다 영화 에서 진급에 눈이 먼 박 중위(이준혁 분)는 원작보다 평면적인 악역으로 각색됐다. 의 한 장면. 여름에 잠잠했던 영화관이 겨울에 들썩인다. 로 시작해 를 거쳐 까지 매주 새롭게 개봉하는 한국 영화마다 화제다. 설과 추석으로 양분되었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개봉 시기가 이제는 여름, 겨울이라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졌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일종의 서사적 관습이 있다.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거의 다 판타지인데, 대개 극명한 선과 악의 대립을 그린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도 서사적 관습이 있다.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과 신파가 그것이다. 그런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선과 악은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가상의 판타지 공간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 위에 세운 사실적 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