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뒤늦게 깨닫는 ‘빈집의 사랑’ 영화 의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은 빈집에서 첫 데이트를 한다. 데이트인 줄 모르고 하는 데이트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탐색하라는 과제를 하다가 같은 동네 정릉에 사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났고, 정릉 토박이인 승민이 제주도가 고향인 서연에게 이곳저곳 안내를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서연의 마음을 단번에 끈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빈집, 버려진 집이다. 승민은 주인이 없는 곳이라 들어가기 망설이지만 서연은 “뭐 어때?”라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두 사람의 성격과 닮아 있다. 서연은 그렇게 빈집의 문을 요란한 소리로 열고 들어가, 죽어 있는 시계태엽을 감아 살려 준다. 승민은 주인 없는 물건에 손을 댔다고 겁내지만, 서연은 또 한 번, 뭐 어때 죽은 거 살려준 건데, 라고 말한다. 그때, 승.. 더보기
가해와 피해, 뻔하지 않은 윤리학 가해자의 날이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다행히도 대개 분별 있는 관찰자이기 때문에 꽤나 합리적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단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애덤 스미스는 먼저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을 믿었다. 법이 아니라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분별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덕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인류는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마련한다. 타인들과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을 때, 그 분별력은 더욱 공정해진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하고, 위로를 건네고, 격려를 보탠다. 최근에 벌어진 한 사립 초등학교의 폭력 사태만 해도 그렇다. 네 명의 아이가 해를 가했고, 한 명의 아이가 해를 입었다. 그런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없다. .. 더보기
‘원더우먼’의 힘, 여성의 힘 1893, 1918, 1928.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1893년은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해이다. 신대륙이었던 뉴질랜드였다. 1918년은 영국 여성들이 투쟁 끝에 30세 이상 참정권을 얻어낸 해이고, 1928년은 그 나이를 20세로 끌어내린 해이다. 정치 선진국이자 우리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인 성평등을 경험한 국가로 여겨지는 영국에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게 아직 채 100년이 안된 것이다. 영국 여성 참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에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져 있다. 만약, 현재 개봉 중인 영화 을 보기 전에 를 본다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농담에서 그 이상의 맥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DC가 새롭게 부활시킨 은 사위어 가던 불길을 살려 줄 불씨로 대접받고 .. 더보기
볼거리보다 이야기 플롯일까, 스펙터클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다를 바 없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도 플롯 우선주의자와 스펙터클 우선주의자가 있다. 볼거리를 의미하는 스펙터클이 없다면 과연 영화가 소설이나 연극과 어떤 차이가 있겠냐고 물을 수 있겠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플롯 없는 볼거리만 이어진다면 그것 또한 행위예술이나 시각미술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대답이 궁색하긴 하다. 대중과 영화의 만남을 다루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영화는 근대의 산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발터 베냐민은 보들레르의 글을 빌려, 영화를 근대인의 지각체계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미적 수단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영화의 형식적 원리가 충격과 혼잡함을 바탕으로 하는 도시적 감각과 어울린다고 본 셈이다... 더보기
살고, 사랑하고, 사유하고 장거리 출장은 드문 기회이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들과 섞여 좁은 공간에 열 시간 이상 머무르는 게, 어디 일상적일 수 있을까? 답답함이 숨통을 조여 오기도 하지만 막상 이륙 후엔 오랜만의 혼자라는, 즐거운 고독감이 찾아온다. 특히 의외의 영화들을 ‘다시’ 발견할 때 그렇다.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상 대개의 기내 영화들은 이미 본 것들인 경우가 많다. 몇 편 보지 않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건 못 본 영화라기보다는 보고 싶지 않아서 미루거나 배제한 작품들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도 오지 않는 긴 비행 중, 기내의 모든 조명까지 꺼진 이후라면, 그렇게 평소라면 보지 않았을 영화들을 건드려 보게 된다. 이번 비행의 수확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였다. 지금이야 가장 대중적.. 더보기
정치와 사업의 민낯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하면 정치와 사업이 떠오른다. 아무나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또 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누구나 사업을 하긴 어렵다. 시작이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패할 확률이 더 높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간혹 듣는다. 정말 정치를 하면 좋을 사람들은 대개 엄두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를 해서는 안될 사람들이 정치판 근처에 얼씬거린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정치적이라는 말은 칭찬이라기보다는 비판이 되고, 수완이 좋다는 말도 그 사람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계산을 따지는지에 대한 다른 표현이 된다. 여기 두 명의 성공한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이다(아래엔 영화의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영화 은 3.. 더보기
비정한 사회의 선악론 ‘보이 A’ - 4월 1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2015년 6월 일본, 책 한 권이 전 사회에 논란을 불러왔다. 라는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1997년 6월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체포된 연쇄살인범이었다. 3명의 초등학생에게 치명적 상해를 입히고 심지어 생명을 앗고 신체를 훼손하기도 했던 살인범이 고작 8년간 복역하고 세상과 만났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범죄자가 14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소년이기 때문에 범죄자는 소년 A로 보호되었다. 범죄 행각을 과시할 정도로 도취되었던 소년은 출소 후,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의 추억을 담은 책을 펴냈다. 그게 바로 이다.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 소년범이라 짧은 형을 살고 나온 범인이 그 상처를 판매했던 셈이다. 영화화되기도 했던 미나토 가나에의 .. 더보기
딸바보와 그 딸의 ‘금기’ 옛이야기 가운데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건 무척 드물다. 이솝 우화, 안데르센 동화, 샤를 페로의 동화들을 뒤져본다고 한들 아버지는 새 아내 그러니까 계모를 집 안에 들이는 계기로 활용되거나 혹은 부재중일 때가 대부분이다. 옛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계모든 친모든 엄마이지 아버지는 아닌 셈이다. 프로이트도 이를 간파해서 엄마와의 애착 관계에서 비롯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룰 때도 아버지는 매개이지 애정의 대상이거나 최종 지점은 아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옛이야기 중에 아버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얼마 전 실사 영화로 변신한 이다. 는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는 매우 희유한 동화이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고 게다가 딸과 아버지 사이가 유독 좋다. 브루노 베텔하임이라는 아동심리학자는 이를 주목했다.. 더보기
자연인 박근혜 공교롭게도, 최근 극장에서 ‘사람의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사람의 본질이라, 그 얼마나 무겁고도 귀한 말이던가? 첫 번째는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 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소녀를 쫓던 악당들은 소녀와 로건(휴 잭맨)의 행적을 알기 위해 로건의 동료 칼리반을 괴롭힌다. 칼리반은 타고날 때부터 멜라닌 색소를 갖지 못한, 그래서 태양을 견딜 수 없는 엑스 맨이다. 영화 은 202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칼리반은 과거에 울버린 로건을 괴롭히는 적이었다. 칼리반에게 햇빛을 쪼이며 악당들은 제안한다. “사람의 본질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잖아? 그렇지?”라고 말이다. 악당은 칼리반에게 로건에 대한 적의가 남아 있고, 그를 추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 더보기
나 자신을 아는 것 “자기 자신을 시험에 부치지 않는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는 그 유명한 델포이 신전의 전언, “네 자신을 알라”의 구체적 지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루소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그렇게 따르기 쉬운 격언이 아니다. 루소는 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러 번 토로한다. 사실 안다고 믿는 자기 자신은 연출되거나 위장된 자기 자신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우리이길 원하는 나를 나라고 믿는다.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속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자신을 알기 위.. 더보기
일회적 삶과 인간의 의지 타인의 말을 외국어처럼 들어라.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타인의 언어를 외국어처럼 듣게 되면 소통의 장애는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애와 만난다. 가령,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미워”라고 말한다면 바로 화가 나겠지만 만일 외국인이 같은 말을 했다면 혹시나 단어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먼저 헤아려 본다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소통에 어려움을 가져온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었다면 영화 를 보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타인의 언어를 외계인의 언어처럼 들어라, 라고 말이다. 영화 는 테드 창의 소설 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간혹 영화가 수입되면서 아쉬운 번역이나 각색이 발생하곤 하는데, 컨택트라는 제목도 그렇다. 는 한국에.. 더보기
유해진과 정우성 사이 이럴 줄 몰랐지만, 지금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라이벌은 바로 유해진과 정우성이다. 의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좀 미안하지만 유해진과 정우성은 출발부터 다른 배우였다. 유해진이 에서 시작해 의 배달부, 잡범과 같은 단역부터 디디고 일어났다면 정우성은 이러나저러나 의 남자 주연으로 영화계에 입성했다. 지금이야 유해진도 주연급 배우라고는 하지만 정우성은 이제야 조연을 해도 괜찮은 배우가 되었으니 출발이 달랐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타고난 외모 탓이 컸을 테다. 악동 뮤지션의 노래 ‘못생긴 척’의 가사처럼, 연극에서 왕자 역할을 하기 위해선 우선 생긴 게 우선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외양적인 차이 외에도 한국 영화계엔 유해진표 영화와 정우성표 영화가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유해진표 영화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