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나이듦의 자리 신라의 어느 사내 진땀 흘리며 계집과 수풀에서 그 짓 하고 있다가 떨어지는 홍시에 마음이 쏠려 또그르르 그만 그리로 굴러가버리듯 나도 이젠 고초롬만 살았으면 싶어라. 쏘내기속 청송 방울 약으로 보고 있다가 어쩌면 고로초롬은 될법도 해라. -서정주, ‘질마재신화 중 우중유제(雨中有題)’ 1975 환갑을 맞았던 1915년생 시인 서정주는 1975년 를 출간한다. 이 시집에는 유독 회갑(回甲)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회갑동일(回甲冬日)’이라는 작품에서 시인은 “가고파 갈 곳도 없는 회갑(回甲)해 겨울날은/ 내 어릴적 안아주던 할머니품 그리워/ 쉬운해전 세상뜬 할머니 친정 마을에 들다”라고 노래한다. 그중 ‘우중유제’는 특히 이제는 회갑, 살 만큼 살았으니 세상사에 아등바등 않고 넉넉히 살다 이 세상을 .. 더보기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한국 영화의 눈물 사용법 동화와 소설만큼 오해되는 말이 또 있을까? 우리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 허황한 이야기를 두고 소설 같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것이 지나치게 예쁘거나 아름다울 때는 동화 같다고 덧붙인다. 동화 같다는 말은 마치 애들은 몰라, 라고 하며 울타리를 치고 어른들끼리 은어를 말할 때, 그 아이들이나 믿을 만한 세계를 가리킨다. 성숙한 어른이 되면 결별해야만 하는 유아적 허구의 세계, 그런 게 바로 동화의 공간이다. 그러나 한편, 동화 같다는 말을 어른들이 쓸 땐 그 의미가 또 달라진다. 어른 세계의 협잡이나 배신이 없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 스노볼 속 공간처럼 아름답게 보존된 세계를 동화라고 부르니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진짜 소설의 세계는 허황하지 않고 진짜 동화의 공간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더보기
호모 사피엔스에게 겸손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영화 에서 들짐승의 생간을 꺼내먹는다. 배역인 휴 글래스가 먹는 거지만 디캐프리오는 직접 연기했다. 문제는 디캐프리오가 채식주의자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평소라면 들짐승의 생간 같은 건 입에도 안 대겠지만, 휴 글래스에게 그건 생존 본능이었다.” 그렇다. 본능, 이었다. 유발 하라리가 쓴 빅 히스토리 를 보면 인류 아니 호모 사피엔스는 원래 수렵채집인이었다. 사나흘에 한 번 사냥에 나서 하루 세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 채집하면 무리 전체가 먹고살았다. 휴 글래스는 대자연 속의 위기 상황에 처하자 자신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던 수렵채집인으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어쩌면 이 말은 지적 설계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 인류가 여전히 동물의 한 종에.. 더보기
내가 너의 아버지다 의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바로 “나는 너의 아버지다(I’m your father)”이다. 똑같은 대사가 한국 영화에서 등장한 적이 있는데, 윤제균 감독의 에서 연구자인 아버지(박중훈 역)가 딸을 헬리콥터에 실어 보내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네 아빠다!”라고 말이다. 같은 말이지만 말의 용법과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문맥이 다르다는 뜻이다. 다스베이더가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순간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결은 지속된다. 아버지이지만 그를 죽여야만 한다. 그는 우주 최고의 악이기 때문이다. 혈연은 다음의 문제이다. 다크 포스가 곧 악이라면 그것을 없애야 세상에 선이 돌아오고, 윤리가 바로 선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아버지 아나킨 스카이워커를 죽인 게 아니라 악의 축 다스.. 더보기
세상 끝에 선 수컷의 포효 먼저 사과 한다. 수컷이라는 말에 대해. 남성이라는 성적으로 온당한 표현이 있음에도, 수컷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에 사과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엔 남성이라는 세련된 문명의 단어가 아니라 수컷이라는 날 것의 단어가 알맞다. 게다가 시방 그들은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온 것처럼,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는 절정에 가 있다. 세상의 끝에 위태롭게 서서 울부짖는 두 남자, 영화 와 의 그들 말이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세상의 끝에서 우리에게 작별을 고한다. 일차원적으로 우선 영화가 끝날 때 두 주인공 모두 한 발 제겨디딜 곳도 없는, 벼랑 끝에서 관객에게 마지막 얼굴을 보여준다. 세상 끝에서 영화가 끝나는.. 더보기
고전 처방전 고전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야,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으로 규정되지만, 고전에 쓰인 ‘옛 고(古)’자 때문인지, 고전 하면 무조건 오래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고전이야말로 현대적이구나 무릎을 칠 때가 있다. 고전 명작들이 거듭 재탄생하는 것을 볼 때 말이다. 12월에는 언제나 필독서로 추천하는 작품 중 두 개가 새롭게 해석되어 선보인다. 하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고 다른 하나는 플로베르의 이다. 두 작품은 유명한 고전답게 이미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았던 1991년 이다. 클로드 샤브롤이 연출한 이 작품은 유독 보바리를 혹독하게 그려냈다. 그 대표적 장면이 바로 음독.. 더보기
환상과 환각의 사이에서 유력한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 그리고 그들을 돕는 정치깡패 안상구가 있다. 뒷거래의 판을 짠 이는 대한민국 여론을 움직이는 유력 일간지 논설주간 이강희다. 더 큰 성공을 원한 안상구는 이들의 비자금 파일로 거래를 준비하다 발각되고, 이 일로 폐인이 되어 버려진다. 그리고 빽도 없고 족보도 없어 변변치 않은 일만 하는 검사가 등장한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부류가 의기투합한다.’ 검사와 정치깡패가 손을 잡고 더러운 권력의 카르텔을 손보기 위해서다. 개봉을 앞둔 우민호 감독의 영화 줄거리다. “복수극으로 가자고, 화끈하게.” 영화 의 의도는 이 광고 문구에 압축되어 있다. 영화는 화끈한 복수극을 꿈꾼다. 이는 곧 관객에게 화끈한 복수의 쾌감을 주겠다는 호언장담이기도 하다. 좀 다르게 생각해보자. 만.. 더보기
획일적 세계에서의 허구와 상상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에는 사소하지만 꽤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빙리의 저택에 방문했던 언니 제인이 그만 병에 걸려 며칠 더 머물게 되었다. 적극적인 동생 리지는 언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빙리의 저택에 가려 한다. 가난한 리지의 집에는 여분의 마차가 없다. 하지만 언니가 걱정된 리지는 걸어서라도 가기로 마음먹는다. 울타리를 뛰어넘고, 웅덩이를 건너 흙투성이 길을 5㎞나 걸어 빙리의 저택에 도착한다. 당연히 엉망이다. 양말도 더러워지고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모습으로 조찬실에 들어가자, 빙리의 여동생들은 그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째려본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손필드 저택에 그와의 결혼을 염두에 둔 잉그램 모녀가 찾아온다. 미혼의 제인 에어가 손필드에 머무는 것을 성가시게 여긴 두 .. 더보기
세 우주와 영화적 정의 ㆍ마션·그래비티·인터스텔라 위축된 ‘상상의 근육’에 자극 인간은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한다. 밀란 쿤데라가 그의 책 에서 했던 말이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범죄가 발생했을 땐 치정으로 인한 살인, 불륜으로 인한 살인, 보험금을 위한 사기살인처럼 단숨에 원인을 추정해 기사로 작성한다.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나면 원인을 알 수 없거나 모호한 경우가 더 많지만 적어도 기사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은 심판하고 지워버린다. 심판은 판단을 포기하겠다는 암묵적 승인이다. 생각의 한쪽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다. 만일 영화에 그러니까 서사라고 부르는 이야기에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심판하지 않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는.. 더보기
노장의 품격, 거장의 인문학 2015년에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 그리고 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 감독은 모두 노장이다. 평균 연령을 내 보자면 70세, 를 연출한 조지 밀러 감독은 만 70세(1945년생)이고 을 연출한 낸시 마이어스는 만 66세(1949년생)이다. 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은 무려 만 77세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단순히 이들의 연령이 70세 정도 된다는 게 아니다. 7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여전히 유연하다는 점에서 놀라웠고 한편 젊은이라면 도저히 갖출 수 없는 삶의 혜안을 가졌다는 점에서 존경스러웠다. 이 세 영화, 세 명의 연출자는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노장의 품격과 거장의 지혜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는 존경할 노장이나 지혜로운 거장.. 더보기
고향, 자아의 거울 ㆍ인격을 덮어주는 마음의 거처 낭만적 기억없이 갈 수 없는 곳 ㆍ‘서부전선’에 소환된 까까머리 전장에서 안락한 쉼터를 꿈꿔 김수용 감독의 1967년작 는 김승옥의 소설 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서울의 제법 큰 규모의 제약회사에 근무 중인 윤기준은 전무 승진을 앞두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사실, 제약회사의 사주는 아내의 아버지, 즉 장인이다. 말하자면 그는 고향 무진 출신 중 가장 출세한 사람 중 한 명이다. 무진에서 세무사로 일하는 친구 ‘조’ 역시 꽤나 출세한 인물 중 하나이다. 윤기준은 여교사로 일하는 하인숙을 아내감으로 추천한다. 그러자, 조가 대답한다. “야, 이 약아빠진 놈아, 넌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놓고 기껏 내가 어디서 굴러온 줄도 모르는 말라빠진 음악선생이나 차지하고 있으면 맘이 .. 더보기
사도’ 자결과 처벌의 아이러니 비극은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 훌륭한 서사로서 비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서 은 비극이 반드시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비극적 사건이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면, 예컨대 살인이나 기타 이와 유사한 행위를 형제가 형제에 대하여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 대하여 혹은 어머니가 아들에 대하여 혹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행하거나 기도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해야 할 상황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일까? 비극이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야 한다니, 그것도 살인과 같은 행위가 가족 가운데서 일어나도록 시인이 추구해야 한다니 말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여기서 시인은 말하자면 이야기를 만드는 모든 창작자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를 꾸며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