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서사 충족의 늪, 환상의 비만 서사적 대리 만족의 우려는 좌절·실패를 전제하기 때문 현실에서 변화를 포기할 때 ‘저항’을 대신해서 등장한다” 호랑이와 하이에나, 얼룩말, 오렌지 주스라고 불리는 오랑우탄과 한 소년이 태평양을 표류한다. 227일간 바다를 표류하던 중 소년만이 유일하게 생존한다. 살아남은 소년에게 사건 조사 위원들이 사고 경위에 대해 묻는다. 호랑이,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미심쩍다. 사건 조사 위원들은 좀 더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소년은 프랑스 요리사와 대만인 선원, 엄마 그리고 자신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해준다. “자, 이제 마음에 드세요?” 이내, 조사관들은 입을 다물고 만다.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 줄거리는 같지만 그 이야기의 여.. 더보기
혐오와 정의, 만족의 두 얼굴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용어 중 하나가 혐오이다. 한국어에는 어색하지만 혐오의 최상급 표현이 등장했는데, 이미 우리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극혐이다. 극혐은 2014년 신어로 선정되었는데, 아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인 ‘극혐오하다’로 기재되었다. 여기엔 어떤 중요한 암시가 있다. 극혐은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싫어하는 마음이 언어와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 그게 바로 우리 사회 극혐의 얼굴이다. 싫어하는 데 그친다면 극혐은 일종의 개인적 취향에 멈출 수도 있다. 개미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미워할 수도 있다. 문제적인 것은 혐오가 이미 우리 사회에서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근래 가장 이목을 끌.. 더보기
‘암살’과 ‘베테랑’ 사이 - 속죄 없는 가해자 최동훈 감독 의 흥행세가 만만치 않다. 개봉한 지 4일이 지나지 않아 300만 이상의 관객이 찾았다는 소문이 들린다. 은 최동훈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좀 독특한 위치에 놓인다. 대개 최동훈 영화의 주인공은 사리사욕을 최고로 치는 개인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로 치자면 상하이 시절의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이 바로 최동훈 영화의 전형적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엔 사리사욕의 반대편 즉 공리와 대의를 아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 하나의 목숨 따위는 초개와 같이 버리는 인물들, 그런 인물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의 인물들은 윤리에 의해 차등지어진다. 적극적으로 항일하는 인물, 뼛속까지 항일하는 안옥윤이나 황덕삼 같은 인물이 가장 윗길에 있다. 그에 비해 속사포는 .. 더보기
공포영화의 죽음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 명제는 공포 영화에도 적용된다.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현실의 소수자들이다. 현실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 혹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진 자들이 공포 영화에서는 주인공으로 전경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일까? 현실의 주인공들은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들 즉 세속적인 기준에 잘 맞는 인물들일 것이다. 권력이나 돈을 잔뜩 가진 사람들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적 기준에 잘 들어맞는 사람들 말이다. 거꾸로 말해,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은 가해자들이라기보다는 피해자들이고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각국의 공포담이나 괴담을 살펴보면 그 사회에서 전통적인 약자가 누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전통적으로 공포.. 더보기
비현실적이면 어때… 스크린 속 세상인데 ▲ “판타지는 영화가 주는 위안 실종된 아이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어두운 현실의 재연보다 거짓 ‘해피엔딩’이 끌리는 이유” 최근에 하게 된 생각 중 하나는 리얼리즘에는 체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리얼리즘이란 냄새나고 어두운 세상을 사실 그대로 비추는,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이다. 나홍진 감독의 를 예로 들 수 있다. 영화 속에서 김미진(서영희)은 살인자 지영민(하정우)이 집을 비운 사이 탈출에 성공한다. 죽을 힘을 다해, 골목 끝 구멍가게에 닿은 김미진은 겨우 안심하고 가게 안 쪽방에 몸을 누인다. 그런데, 그때 경찰서에서 풀려난 지영민이 마침 담배를 사러 그 가게에 들르고, 공포에 몸서리치는 주인 아주머니의 푸념을 듣게 된다. 미진은 결국 그곳에서 지영민과 마주쳐 목숨을 잃는다. 는 그녀를.. 더보기
자기 단속 사회의 역습 ▲ “스크린 속 상상의 배경이던 통제와 치유 가능한 질병, 무능한 정부의 비밀주의 속 현실의 위협과 공포로” 누군가가 콜레라가 마을들을 황폐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우르비노 박사는 한시도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말했다. “아주 특별한 종류의 콜레라임에 틀림없군. 시체들의 목덜미에 하나같이 확인 사살한 총구멍이 나 있으니 말이야.”(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중에서) 수전 손택의 은 질병이 사회적 코드가 된 사태를 보여준다. 가령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은 성적 문란을 암시한다. 결핵이 파리한, 근대적 지식인의 병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결핵은 의 비올레타, 의 샤틴이 걸렸던 병이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걸린, 낭만적인 질병 그게 바로 결핵인 것이다. 한편 영화.. 더보기
세 여자 ▲ “세상을, 남자를 믿어서 나락에 빠지는 여자들 순진한 ‘신데렐라’의 믿음이 여자를 구원할 수는 없다” 신데렐라는 어떻게 태어날까? 신데렐라는 믿어야 한다. 호박을 마차로 바꾸어 주고, 재투성이 옷을 화려한 드레스로 바꿔준다는 요정 할머니의 말을 믿어야 한다. 순결하고 착하게 살아간다면 정의롭고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 구원해 준다는 어머니의 말도 믿어야 한다. 이 순진한 믿음의 세계가 더러운 현실과 만나지 않을 때, 진공상태의 스노우볼 안에서 신데렐라는 공주가 될 수 있다. 아니, 왕비로 신분 상승할 수 있다. 하지만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화다. 동화의 세계는 너무나 순결한 나머지 현실의 공기에 닿는 순간 바로 변질되고 만다. 현실의 여자들을 보면 그렇다. 그녀들은 믿기 때문에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더보기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 ▲ “한 기업인의 죽음과 ‘리스트’ 최고 권력층 부패 드러나고 정의와 진실이 찾아오는,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날 때, 소설 같은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때 ‘소설’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거짓말처럼 놀라운 일을 의미한다. 가령, 이런 이야기 말이다. 갓 스무 살이 된 한 남자가 모함을 받아 11년간 수감생활을 한다. 절치부심 끝에 그는 탈옥하고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복수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의 줄거리이다. 억울한 일이 있거나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복수를 꿈꾼다. 하지만, 복수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복수한다는 것은 손과 발이 모두 묶인 상태 즉 패배로부터의 탈피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일단 음모에 빨려들게 되면 복수의 힘을 잃게 된다. 이.. 더보기
2015년 어벤져스 서울 ▲ “‘우리’만 알아보는 서울 낯익어서 더 낯설어 ‘정서’가 없는 공간은 단순 촬영장소일 뿐”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김승옥, ) 사춘기 시절 이 문장을 읽고 난 후 난 언제나 무진에 가고 싶어 했다. 안개가 밤사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감싸고 .. 더보기
불평등과 침묵 ▲ “노인 집단 내의 빈부격차 노인 빈곤율보다 더 심각 ‘국제시장’ ‘장수상회’ 등 우아한 노화·죽음만 다뤄” 노화와 죽음, 인간이 가장 꺼리는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노화와 죽음은 하나의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이 늙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 뒤에 바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노화의 증상은 우리의 신체가 마모되고 있으며 언젠가 그 기능을 중지하리라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준다. ‘늙는다’는 자각이 불쾌하고 우울한 이유이다. 한국 영화계에 노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14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 노부부의 절절한 사랑을 보여준 에 이어 4월 극장가에도 나란히 두 작품이 걸렸다. 와 이 바로 그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장년층이 주인공이 되다 보니 노화, 병, 죽음이 부주제를 형성한다... 더보기
청춘, 가벼움이 허락된 시간 ▲ “되돌아보는 눈으로만 그린 방황과 혼돈의 ‘아픈 청춘’은 그만! 진짜 스물의 순수한 가벼움은 현실의 중력을 이기는 힘이다” 청춘이라는 말과 함께 어떤 단어들이 떠오를까? 소설가 김연수는 이라는 책에서 “내가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즈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라고 쓴 바 있다. 그렇다. 이상은의 노래 가사처럼 젊었을 땐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젊기 때문에, 젊음의 그 에너지 자체가 용처 모르는 힘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기, 생각보다 괴로움은 많은 에너지를 태운다. 젊음이 에너지가 되어 괴로움을 활활 태우는 시기, 그래서인지 청춘을 그린 영화들은 방황을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기억에 남는 청춘영화들, , , 와 같은 영화에서 청춘.. 더보기
이질적 감각의 맛 ▲ 영어덜트 원작 영화, 한국서는 늘 참패 ‘킹스맨’은 영어권보다 크게 흥행 주목 보편적 영국 이미지 고유한 색깔 유지 ‘환상’아닌 현실 같은 신선한 자극 선사 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서는 드물게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영국이나 호주 같은 영어권 국가보다 흥행 성적이 더 높다는 것도 화제가 되고 있다. 지금 할리우드 영화계는 할리우드 영화의 주요 소비국으로 떠오른 한국의 관객 성향을 분석하느라 매우 분주해 보인다. 사정은 한국 영화계 내부도 유사하다. 우리 영화 시장에서의 흥행 성적이 북미 흥행 성적과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영어덜트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판타지 영화들만 봐도 그렇다. 등은 높은 아마존 판매율을 기반으로 영화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