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덕혜옹주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2000년대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이 된 본 시리즈는 기억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최종병기 몸을 가진 남자가 기억을 잃었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뇌가 기억하지는 못한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이고 판단보다 실행이 앞선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반응하던 남자는 스스로를 그렇게 단련한 몸의 주인, 그러니까 기억을 찾고자 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찾는 이야기, 이 새로운 서사 위에 몸과 몸이 부딪치는 실제적인 액션이 얹혀졌다. 이 아이러니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었던 본 시리즈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9년 만에 맷 데이먼과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함께한 본 시리즈가 개봉했다. 이번엔 제이슨 본이 기억의 상당부분을 되찾았다.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 헤맨 게 지난 시리즈였다면 이번엔.. 더보기
최소 인간 실격에 대하여 “불행한 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행복한 자들에게는 관용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의 마지막 장, ‘마지막 어둠, 마지막 새벽’의 첫 구절이다. 이런 문장도 있다. “운수 좋은 이들이 자행하는, 불운한 이들에 대한 착취.” 빅토르 위고의 다른 소설 의 한 구절이다. 이 두 문장은 어쩌면 하나의 짝일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자들은 불행한 자들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지만 오히려 불운한 이들을 착취한다. 빅토르 위고는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행복이 ‘운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은 그저 운수 덕택이지 그 사람이 누려야 마땅한 본질적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운수의 문제이다. 그러니 운수가 좋은 사람들은 운수가 나쁜 사람들을 연민해야 한다. 그건 최소.. 더보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단어, 노년 “그전까지는 돈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돈을 경멸했어요. 우리 집에서는 돈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금지였죠. 돈은 부끄러운 것이었으니까요. 우리는 돈이 부재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어요.”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소설 에 실려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소비에트연합, 그러니까 소련이 패망하자 사람들은 자유보다 먼저 ‘돈’을 만났다. 돈이야 그전에도 없었겠냐만, 돈이라는 것의 가치 그리고 돈이라는 것의 상징성이 자유보다 먼저 감각을 급습한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다음이다. 사람들은 돈을 알고부터 ‘책’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책은 인생을 대신하는 것이었기에, 돈이 없던 시절, 책은 상상으로 자유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상.. 더보기
그 시절, 우리가 모르는, 소녀 나도 한때 소녀였다.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상투어가 아니라 여물지 않은 상처와 혼돈으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는, 고백이다. 소녀라는 이름이 들어간 대중가요, 드라마, 영화들은 대개 그 아름다움을 칭송한다. 혁오가 리메이크한 이문세의 노래 속 소녀도, 대만의 청춘물 의 소녀도 그렇다. 이런 가사와 제목 속 소녀들은 하얀색 블라우스에 생머리를 곱게 빗은 소녀일 것만 같다. 친구들과 속닥속닥 귓속말을 나누고, 하얗고 맑은 무릎 위에 고운 시집을 올려놓은 채 까르르 햇살이 부서지듯 웃는, 그런 소녀 말이다. 하지만 소녀시절만큼 힘든 시기가 또 있을까? 우리는 어린 시절의 삶을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모의 학습이나 훈련으로 취급하곤 한다. 유년기 혹은 아동기 등으로 나뉘는 성장발달과정으로 접근할 때는.. 더보기
불편한 ‘아가씨’는 누구의 아가씨인가 ※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방해가 될 만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한 말들로 가득해…봐.” 사라 워터스의 소설 는 모드의 고백으로 끝난다. 모드는 소위 귀부인을 위한 야설을 쓰는데, “너 같은 여자 아이가, 어떻게 이런 소설을 써?”라고 하녀 수전이 묻자 아가씨 모드는 대답한다. “난 숙녀가 아니야.” 그리고 이 책들은 “내가 널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한 말들로 가득해…봐”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사라 워터스의 소설 는 남성의 청각과 시각, 상상력을 위해 쓰였던 ‘야설’을 읽어주던 숙녀, 다른 말로 하자면, 남성이 원하던 여성 낭독자였던 아가씨가 자신의 욕망을 써내는 작가로 변신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숙녀였던 모드는 남성의 욕망을 채워주는 풍경의 일부였지만, 작.. 더보기
권위의 탄력 즘 한창 화제는 ‘해외’다. 칸영화제와 맨부커상으로 5월 내내 언론이 뜨겁다는 이야기다. 침체기에 돌입한 것으로 보였던 한국영화에 활기를 준 것도 바로 칸이다. 이후 오랜만에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박찬욱 감독의 를 비롯해, 등의 비경쟁 부문 초청작도 여러 편이다. 주목할 만한 시선에 과 두 편이 초대받았던, 작년에 비해 훨씬 더 풍성한 결과이다. 해외 영화제 초청 및 수상이 뭐 그렇게 큰일일까 싶지만 사실상 거의 뉴스가치에서 제외되었던 한국 영화에 활기를 준다는 점은 주목해야만 한다. 한동안 뉴스에서 주목하는 한국영화는 주로 숫자로 환산되는 경제적 가치 즉 천만관객을 돌파한 영화들에 한정되었다. 20여년 전처럼 개봉 영화를 뉴스에서 소개한다거나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사회적 현상을 읽고 짚어내는 기사들은 .. 더보기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한국의 ‘민낯’을 만난 전주국제영화제 영화제에 머물고 있다. 올해 17회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이다. 영화제의 낮과 밤은 일상을 보내는 서울의 낮과 밤과는 많이 다르다. 어떤 점에서, 영화제를 경험한다는 것 자체가 일상과는 다른 체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평소와 같은 평일 낮이라면 강의실에 있거나 언론시사회 현장에 있겠지만, 영화제에서는 다르다. 낮에는 주로 한국에서 개봉하기 힘들 것으로 예측되는 영화들을 본다. 밤이면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만난다. 일상의 시간표가 느슨해지고, 거의 고행에 가까운 영화제 시간표가 새롭게 재구성된다. 올해엔 한국 영화만 15편을 보게 되었다. 모두 보고 난 첫인상은 바로 이 15편이 한국의 민낯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극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다큐멘터리 즉 사실적인 기록 영화이다. .. 더보기
연애도 사치라 하오 청춘영화라고 부를 만한 장르가 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젊은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또래가 겪을 만한 고민을 경험한다. 불안정한 미래, 사랑, 연애, 가족과 같은 문제로 고민하면서 우리가 흔히 자아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온몸으로 앓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청춘영화라면, 이나 처럼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과 한동안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고교생 얄개 이야기를 들 수 있겠다. 청춘은 매우 동시대적인 개념이다. 청춘영화들만 쭉 늘어놓고 보더라도, 청춘의 의미와 고민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눈에 들어온다. 가령, 1970년대 대학생 이야기인 에서 대학생 병태는 가위를 들고 서 있는 군인을 피해 도망가고, 여자친구 영자는 미니스커트 단속반을 피해 다닌다. 연애를 하는 병태의 가장 큰 고민.. 더보기
시간의 무게 또, 다시, 4월이다. 4월 이후,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기가 불편했다. 배가 침몰한다. 어린 학생들이, 한 학년이 전부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고 있다. 슈퍼맨이 있다면 바로 그런 순간 등장해야 한다. 한 손으로 거뜬히 배를 바로 세우고, 고인 물을 빼낼 뿐만 아니라 이미 바다에 빠진 아이들을 구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슈퍼히어로물’이란 세상에 그래도 조금은 속을 여지를 가진 순진함 덕분에 가능한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슈퍼히어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슈퍼히어로는 알리바이다. 시간은 흐른다. 미래로만 흐른다. 시간의 흐름은 일방향적이며 비가역적이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플래시백으로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비약적으로 시간을 건너.. 더보기
종적 연민에 대하여 처음 본 이야기는 아니었다. “헝가리 의사 미클로스 니즐리는 아우슈비츠 특수부대의 극소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살아남은 그는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줬다. 한 소녀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얽히고설킨 시체들의 몸을 풀어 호스의 물로 씻고는 화장터로 시체들을 운반한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가스실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녀는 무엇인가를 보았고, 또 기억할 수 있고, 따라서 발설할 수 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사람들은 무스펠트가,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그녀의 목을 내리치는 장면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건 그들의 미래이기도 했으니까. 니즐리의 경험담은 또 다른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가 쓴 회고록 에 실려 있다. 그는 이 사태를 두.. 더보기
파수꾼의 윤리 사각지대(死角地帶)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눈에는 시계(視界)라는 게 있어서, 어떤 위치에 섰을 땐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여긴다. 수많은 진실들도 그렇다. 대개 진실은 드러나지 않은 게 아니라 다만 눈을 돌려 바라보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주목을 뜻하는 ‘스포트라이트’는 그런 점에서 사각지대와 정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부분을 밝게 비춰, 보라고 유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스포트라이트이다. 연극 용어에서 스포트라이트는 관객이 주목해야 할 부분을 알려준다. 조금 다른 의미이지만 각광을 받는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은 를 단순히 특종팀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더보기
부끄러움을 배웁니다 “의지(意志)와 지성(知性)은 동일한 것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칠판 위에는 이 한 문장이 쓰여 있다. 의지와 지성은 과연 동일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때론 의지와 지성이 동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빛이 아니라 어둠을 자각하는 자”, 그런 자를 일컬어 동시대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감벤에 따르자면, 동시대인이란, 시대의 어둠을 보고, 펜을 현재의 암흑에 담그며 써내려 갈 수 있는 자이다. 문학이란 어둠 속에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빛을 포착하는 행위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산문을 쓴다는 것은 곧 잠행 가운데서 미래를 기다리는 행동이기도 하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동시대인이 되겠다는 선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 윤동주는 어둠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