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가공식품에 밀려난 요리사 가끔 아이가 월초에 받아오는 급식표를 들여다본다. 학교급식은 당대의 음식을 말해준다. 아니, 조금 더 보수적이고 진지하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음식을 먹여야 한다는 고민이 있다. 수수잡곡 영양현미밥, 무생채무침, 대파와 고사리나물 같은 것들이 많다. 물론 이런 걸 아이들이 좋아할 리 없다. “이런 거 아이들이 잘 먹니” 하고 묻자 “욱!”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즉각적이다. 그럼 뭐가 환영받아? “이미 만들어져서 들어오는 돈가스, 스파게티지 뭐.” 그렇겠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학교 음식과는 달리 시중은 대개 이런 음식이 아이들의 먹거리다. 아이들 음식뿐만 아니다. 가정의 밥상은 공장이 점령한 지 오래다. 냉장고를 열어보라. 열에 일고여덟은 바코드가 붙어 있는 존재들이다. 자연에서 건너와 최소한의.. 더보기
식탁에서 하는 도덕 공부 4월11일자 경향신문에는 우울한 기사가 하나 실렸다. 남극해와 아프리카에서 우리 어선이 남획으로 국제적인 물의를 빚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원양어업에 대한 국내 규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무역제재를 가하겠다는 경고도 내놨다. 사실 이 문제는 그다지 간단치 않다. 좋은 장비로 무장한 강대국 중심의 수산업 패권, 어족 고갈과 쿼터제로 궁지에 몰린 원양어업의 현실, 더 많은 수산물을 먹으려는 인간의 욕망,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식량 주권 문제까지 얽히고설켜 있다. 비단 수산물뿐 아니라 국력이 커지고 있는 주요국들, 그중에서도 중국에서 유제품과 고기를 포함한 수산물 소비가 폭증하는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도 여기에 포함된다. 좀 다른 얘기이지만 중국의 소비 증가 문제에 관해서 걱정하는 .. 더보기
밀라노가 놀란 한국식 요리 박찬일 | 음식 칼럼니스트 요리유학 붐을 타고 외국의 유명 식당에서 일하는 한국인 요리사들이 있다. 대개는 단기 실습생이다. 정식 직원으로 월급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자국인도 취업을 못해서 쩔쩔매는 판에 외국인을 정식으로 고용하는 건 식당주로서 부담이 많다. 또한 그쪽 요리를 잘하는 외국인도 당연히 드물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개는 월급이 없는 무상 실습생에 그치게 된다. 더구나 미슐랭 별이 달린 고급식당이라면 실습생 자리조차 얻기 어렵다. 이름을 올려놓고 몇 년씩 대기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최대 도시 밀라노는 화려한 패션과 미식의 도시다. 미슐랭에서 별을 받은 식당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사들러(Sadler)라는 이름의 식당은 별을 두 개나 받은 터줏대감이다. 이탈리아 역대 총리와 대통령 여럿이 식사를 .. 더보기
‘호스피털리티’와 버선발 박찬일 | 음식 칼럼니스트 한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는 고구려호텔에 간 적이 있다. 그 호텔의 서비스야 다들 알아준다. 과연 깍듯한 태도가 잘 훈련받았다는 인상을 풍겼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이 촌티는 그만 돌아갈 곳을 잃어버렸다. 여기저기 헤매다가 나를 담당했던 웨이터를 만났다. 이제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겠다는 반가운 마음에 나는 환하게 웃었는데, 그는 별로 반갑지 않은 것 같았다. 얼굴에 빗금을 쫙 긋더니 “이곳은 손님이 오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너무도 단호한 태도에 나는 오금이 저려 아까 테이블에서 수프를 소리나게 들이켠 때문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한복을 입고 온 것이 아닌가 내 옷차림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알고보니 내가 헤매다 당도한 곳이 그들이 음식을 내오고 들여가.. 더보기
마트에 빼앗긴 것들 박찬일 | 음식 칼럼니스트 내가 주로 일하던 합정역 근처에선 대형마트인 홈플러스의 신규 출점을 반대하는 항의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결국 홈플러스는 15개 물품의 판매를 제한하는 조건으로 문을 열었다(그 물목에 내 평생 거의 먹어본 적이 없는 소 등뼈와 석류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논외로 치자). 누구나 예상하던 수준의 결말이었다. 직접당사자인 인근 재래시장 상인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여러 집단이 함께 싸운 결과가 그랬다. 우리는 마트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매주 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전단은 우리 욕망을 부추긴다. ‘한정 판매’ 하는 상품을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 들여놓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게 만든다. 마트 등장은 오래된 일이 아니지만.. 더보기
밥값의 ‘불편한 진실’ 박찬일 | 음식 칼럼니스트 딸아이가 새 학기를 맞아 월간급식표를 받아왔다. 밥상을 보지 못했으니 급식의 질은 모르겠으나, 일단 서류상으로 본 것으로는 괜찮다. 여러 선생님들의 고민이 농축된 밥상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가공품과 전통 음식 사이의 균형을 고려한 흔적이 보인다. 죽 훑어가니 한 끼당 ‘단가’가 나와 있다. 3880원이다. 올해 더 올랐다. 중학교 1, 2학년의 무상급식이 시작되어서 그렇다던가. 올랐지만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장을 봐서 상을 차려본 사람은 안다. 한 끼당 그 정도 돈은 들여야 명색이 밥상이 된다. 시중의 밥값에 생각이 미친다. 6000원 안팎이다. 동네마다 다르지만 그 정도다. 당신에게 묻는다. 가격불문하고 학교급식과 시중 백반 중에서 선택해서 먹으라고 한다면? 대.. 더보기
‘미원’에 대한 오해 냉면에 유별난 관심을 가진 나는 종종 그 국수의 ‘원류’에 대한 호기심으로 북한 책을 본다. 냉면은 역시 평양이 본고장이고, 많은 그쪽 출판물들이 냉면을 다룬다. 어떤 책에는 ‘민족의 자랑’이라는 서술도 해놓았고, 또 다른 책에는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께서는 냉면을 널리 인민이 먹을 수 있도록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교시했다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나는 역시 요리법에 흥미가 있는데 궁금한 건 도대체 진짜 북한 냉면은 뭘로 만드느냐 하는 점이었다. 꿩고기네, 동치미네 하는 조리법 끝에서 나는 뜻밖의 재료를 발견하고 웃고 말았다. ‘맛내기 조금.’ 두말할 필요 없이 ‘미원’을 이르는 용어였다. 뭔가 우리보다 자연적이고 환경친화적일 것 같은, 그래서 공산품을 최대한 배격할 것 같은 북한의 요리계도 결국 이 ‘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