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일본서 찾은 한국음식의 미래 후쿠오카에 몇 번 취재갈 일이 있었다. 이른바 유명한 ‘맛집’에서 한국어를 듣는 일이 어렵지 않다. 최고라는 라멘집에 줄을 서 있으면 한국어가 심심찮게 들린다. 포장마차(야타이)로 유명한 나카쓰 천변을 걸으면 한국어로 호객하는 일본인도 있다. “아저씨 라멘, 맛있어요!” 일본 식도락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비행기도 비싸지 않고, 부산에선 배편으로도 규슈지역까지 빠르게 갈 수 있다. 이국적인 풍물에 ‘원조’ 일본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 인기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 갈 때마다 그 음식들의 역사성에 눈길이 간다. 유럽이 전해준 돈가스의 변신, 단팥빵과 카스테라의 일본화 과정, 짬뽕과 라멘, 교자에 얽힌 동양 삼국의 내밀한 교류사는 가히 살아 있는 역사 교과서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예를 들어 유럽의.. 더보기
‘을’의 도시락 냄새 새벽 시장을 보러 첫 전철이나 버스를 탈 일이 잦다. 새벽 이른 차는 으레 자리가 텅텅 빌 듯하지만, 뜻밖에도 만원이다. 자칫하면 앉을 자리도 없다. 장거리 통근하는 보통 월급쟁이들도 있겠지만 들고 있는 가방을 보면 도심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이다. 나이도 여간 많은 게 아니다. 객차당 평균 연령 60은 넘는 듯하다. 이즈음의 객차에서는 음식 냄새가 난다. 흔한 5000원짜리 백반 사 먹을 형편이 안되어 대개는 도시락을 싸서 다니기 때문이다. 빌딩 청소 노동자. 그들의 보편적인 이름이다. 빌딩 안에 작은 탈의실이라도 있으면 밥이라도 지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꼼짝없이 차가운 도시락을 들어야 한다. 예전에 다니던 직장은 그분들이 쓸 다용도실이 있어서 늘 음식 끓이는 냄새가 났다. 요즘 첨단 빌딩은 이.. 더보기
노동하는 밥, 시장의 밥 언젠가 허름한 목로에서 빈둥거리며 낮술을 한 잔 하고 있었다. 불콰하도록 술을 마시면서 쓸데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데, 목에 수건을 두른 노동자가 두엇 들어와서 국수를 시켰다. 그들이 후루룩 소리도 요란하게, 왕성한 식욕으로 국숫발을 삼키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너무도 부끄러워서 술잔을 놓았다. 대낮의 술추렴 탁자는 그걸로 끝났다. 창피해서 얼른 셈을 치르고 목로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아마도 인생 최대의 지독한 숙취였다고 기억한다. 노동하는 이들의 식탁은 진실되다. 그것이 곧 생산으로 이어지는 신성함이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 새벽에 장을 보면, 내가 먹는 밥도 아닌데 목이 멜 때가 있다. 막 짐을 부려놓고 추운 길가에서 식은 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이는 까닭이다. 시장이란 본.. 더보기
돼지국밥과 노무현 부산 출신인 내 친구는 농담 삼아 서울살이의 불편함을 두 가지 들곤 한다. 순대 먹을 때 쌈장 안 주는 것, 그리고 맛있는 돼지국밥집이 없다는 것이다. 영문 모르는 나는 “어이, 순댓국밥이 있는데 뭘”하면 손사래를 친다. “그기, 서로 다른 기다. 니는 간짜장과 짜장이 같나?” 이런다. 부산에 여러 번 돼지국밥 취재를 갔다. 만드는 방식에 어떤 원칙은 없어보였다. 누구는 사골이나 머리뼈를 넣지 않는 것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넣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부산의 신문을 검색하면 이 음식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사실을 몇 가지 알 수 있다. 종친회나 동창모임이 으레 돼지국밥집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서울 순댓국집에서 그런 행사가 열리는 건 드문 일이다. 또 개업인사 코너에 돼지국밥집이 유독 많다. 아닌 게 아니라 버스.. 더보기
겨울엔 역시 ‘굴’ 강풍이 빗자루처럼 얼굴을 후려쳤다. 코털까지 얼어서 서걱거렸다. 멀리 거뭇거뭇한 것이 굴밭이란다. 서해 최대의 굴 생산단지인 보령시 천북면 앞바다. 새벽에 물때 맞춰 현장에 나갔다. 인솔자 박상원씨(천북수산대표)가 붉은 장화를 신고 앞장섰다. 특이하게 천북의 굴은 바다 한가운데 넓게 펼쳐져 있다. 문자 그대로 굴밭이다. “옛날에 송지식이라고, 소나무 기둥을 박아서 굴을 양식했지, 그넘들이 새끼 치고 어울려서 아주 밭이 된 거야. 굉장허쥬?” 아닌 게 아니라 장관이다. 보통 서해안 굴은 투석식으로 알고 있는데, 수확량이 적고 까다로워 많이 줄었다. 송지식의 특징은 소나무 기둥이 썩어 없어지면 물이 얕은 갯벌에 알아서 넓게 자란다. 먹이도, 관리도 필요없다. 문자 그대로 자연산이라고 해도 된다. “철 되면 .. 더보기
거리에도 요리사가 있다 요즘 양극화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다. 식당가도 비슷한 듯하다. 골목의 허름한 밥집들은 손님이 줄고 경쟁이 심해졌다. 존폐를 걱정한다. 반면 강남과 분당, 판교에서 제법 값이 나가는 식당들은 큰 어려움이 없는 듯하다. 알다시피 나는 비싼 음식을 만든다. 한 그릇에 2만원 안팎 하는 음식들이다. 본디 가난하게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런 음식을 만드는 게 합당한 것인지, 무엇보다 양심에 기꺼운 일인지 늘 반문하게 만든다. 자본주의란 돈이 돌아야 하고, 부자들이 주머니를 열어야 돌아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드는 좀 비싼 음식들이 더 잘 팔리는 게 무용한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나 태생적인 이 불편함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 자기반성이랄까, 번민을 더하게 하는 한 권의 책이 내게 .. 더보기
피맛골의 애환 재개발이란 말은 용어 자체가 이미 수직적이고 폭력성을 내포한다. 본디 개발이란 말부터 철저하게 권력자의 의지가 충만하다. 여기에 ‘재’개발이란 당초 그 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는 실체적인 건물과 그 사이를 채우는 공간의 기운,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람과 집단의 기억을 다 허물게 되어 있다. 어느 날 놀이공원 짓듯이 바꾸어버린 청계천도 그 현장이다. 청계천을 복구하는 일이야 누가 반대할 것인가. 문제는 그것이 레고 쌓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결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야는 넓어졌지만, 청계천과 고가 근처에 삶을 지었던 집단의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피맛골도 그렇다. 최악의 도심 재개발로 손꼽히는 현장이다.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다. 대포 한 잔을 해도, 정취가 없다고 하소연한.. 더보기
문학 속의 음식 나는 이상하게도 본론보다 ‘지엽말단’에 몰두한다. 뇌가 이상한지 주제보다 변두리 사설이 더 당긴다. 잘 차린 메인 요리보다 주는 둥 마는 둥 하는 짠지 한쪽에 눈길이 가고, 드라마 주인공보다 소박한 단역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석규와 백윤식이 나온 에 등장했던 절봉이는 지금 뭐하시는지? 소설을 봐도 그렇다. 줄거리나 주제보다는 거기 등장한 사소한 사건들이나 인물, 음식 따위의 기억이 더 또렷하다. 얼마 전에는 순전히 막걸리와 돼지갈비의 사회적 연혁이 궁금해서 먼지 뒤집어쓰고 있던 소설 을 다시 끄집어냈다. 줄거리는 잊어도 주인공이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돼지갈비를 뜯는 장면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1960년대가 배경인 이 소설에 과연, 그 장면이 있었다. 서울 변두리를 다룬 이 소설은 .. 더보기
임종 음식 연말은 요리사들에게 최악(?)의 시기다. 거의 휴무도 없이 크게 늘어난 손님을 맞는다. 그걸 이쪽 세계에선 ‘쳐낸다’고 표현한다. 겨우겨우 힘겹게 일을 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요리사 일을 하면, 제일 불편한 것이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누는 일이다. 퇴근 후 모임에 가면 파장 무렵이니, 흥이 따로 놀아서 어색하다. 게다가 배는 고픈데, 녀석들은 상을 물리고 가볍게 맥주나 마시려고 든다. 끝난 상에 앉아 삼겹살 일인분을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늦은 술자리를 찾아가는 대신, 한가한 낮에 몇몇 친구들과 만나 시내 식당에 간다. 대개 우리 식당들은 밤에는 직장인 대상으로 술을 팔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팔아 운영한다. 재미있는 것은, 시내의 유명한 노포들에서는 독특한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는.. 더보기
예약 살기 퍽퍽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연말에 모임들은 한다. 호텔을 비롯한 고급식당들은 한 해 농사의 성패를 십이월에서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연말에 자리조차 잡지 못해 음식 맛이고 뭐고 그저 예약만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요새는 외식업소도 크게 늘고, 경기는 푸르죽죽하니 예약장부가 별로 지저분해지지 않는 듯하다. 요새 예약문화가 자리잡았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느끼는 기분은 별로다. 식당의 ‘주적’인 ‘노 쇼(no show)’ 때문이다. 예약 취소는 상관없다. 문제는 아무 연락 없이 아예 오지 않는 거다. 지나가는 손님을 바라보고 있는 집들은 덜한데, 외지거나 비싸서 예약 중심으로 움직이는 식당이라면 충격이 크다. 노 쇼를 넘어 이쪽 은어로 잠수도 있다. 시간에 데어 손님이 .. 더보기
간장과 깃코만 사이 우리 맛의 비결은 흔히 장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보다 장 문화가 월등히 발달했다고들 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여부를 떠나 한국인은 장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근래 20~30년간 외래 음식의 급속한 수용이 있었다. 마요네즈와 케첩이 부엌의 필수(?) 양념이 되었다. 와사비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일은 흔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장으로 우리 음식의 표정을 만들어간다. 뜨끈한 된장찌개와 쌈장에 풋고추를 곁들이고, 고추장 얹은 비빔밥에 간장으로 볶은 반찬도 다 장(醬)이 들어간다. 간장에 절이고 삭힌 장아찌는 물론이다. 감칠맛은 음식의 맛을 끌어올리는 일등 재료다. 감칠맛이 많이 나는 고기가 귀해서 우리 조상은 대신에 콩으로 맛을 냈다. 콩이 고기처럼 감칠맛을 낸다는 것을 알았던 것.. 더보기
아끼는 식재료, 배추·대파 내게 아끼는 식재료가 뭐냐고 묻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이탈리아식을 하니까 푸아그라나 멋진 올리브오일, 최고 등급의 쇠고기를 먼저 떠올리는 모양이다. 죄송하게도 나의 숨겨진 맛 재료는 평범한 것들이다. 우선 이 계절이라면 대파와 쪽파다. 요즘의 파는 감칠맛이 제대로 실린다. 얼마 전에 어린 학생들에게 고기를 구워준 일이 있었는데, 대파를 아무 양념 없이 불에 구워냈다. 파라면 질색을 하는 아이들이 한 조각 먹어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파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어요!” 대파에 기름을 발라 그냥 가스불이나 숯, 연탄불에 구우면 된다. 달콤하고 진한 맛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고기 구울 때 늘 곁들이는 감자와 양파 말고 대파를 얹어보시라. 대파 한 단 값은 정말 서운할 정도로 싸다. 양식(洋食) 만들 때 쓰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