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사라지는 중국요리 산증인들 굳이 재론하지 않아도 우리 외식(外食)사, 요리사에서 중국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노인부터 이삼십대 청년까지 젓가락 가지런히 탁자에 올려놓고 그 검은 국수 한 그릇 기다리던 추억이 있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고종사촌형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짜장면이 나왔던 기억(얼마나 별나고 귀한 음식이었으면)부터 첫 번째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외상 짜장면을 먹었던 서울역전의 중국집까지 찬란한(?) 개인사에서 춘장 냄새가 난다. 창피한 얘기지만 고등학교 시절 친구랑 짜장면 많이 먹기 내기를 하다가 두 그릇 반째에 기어이 구토를 해서 패하고만 쓰라린 ‘흑역사’도 있다. 우리 사회사에서 중국음식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특유의 철가방이 민속박물관에 소장되고, 인천의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 박물관’까지 있으니 .. 더보기
김칫값 받습니다 서울 한구석에 술집을 하나 열었다. 양식을 배운 요리사이지만, 음식에 국경이 어디 있고 주민등록이 어디 있는가 하는 생각에 한식도 같이 판다. 말하자면 김치 같은 것인데, 제법 인기가 있다. 한참 무더위가 오기 전에는 오이로 소박이를 담갔다. 알이 실한 총각무도 곰삭게 익혀보았다. 무람한 일이지만, 김치에 값을 매겼다. 여러 번 말한 바 있는데, 우리 김치는 제값을 못 받아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식당에서 김치 한 점 씹으면서 그 원산지며 제조방법을 의심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매우 복합적인 문제이기는 한데, 그 원인 중의 하나는 ‘공짜’에 ‘무한 리필’인 탓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백반 한 그릇보다 비싼 값을 매겨 팔았다. 대신 최고의 재료를 썼다. 만드는 이의 이름을 메.. 더보기
열차집 오래된 우리 식당들의 공통점 중에는 특이한 ‘상호’가 있다. 듣기만 해도 정감이 가고 기억하기 쉬운 작명이다. 육교집, 골목집, 세번째집처럼 위치를 뜻하는 것이 있고 주인의 고향을 따서 용인집, 전주집, 부산집도 있다. 가게의 특징을 보여주는 집도 많다. 종로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던 열차집도 그렇다. 집과 집 추녀 사이의 기다란 공간에서 장사를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은 대개 주인의 작명이 아니다. 단골들이 자신들의 편의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입말의 맛을 보여준다. 철학적 깊이와 유식한 내력을 가진 작명도 좋으나, 이렇게 민중의 말로 지은 집들은 오래도록 살아남게 마련이다. 손님들이 이름을 지어 붙인다는 건 애정의 척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 초년 시절이던 20여.. 더보기
광란적 에너지 시대 장 보느라 새벽에 출근하는 일이 잦다. 새로 도입된 전동차가 얻어걸릴 때면 몸서리를 칠 때가 있다. 두 가지 이유다. 실내기온이 너무 낮기 때문이고,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에서다. 살갗에 소름이 돋도록 춥기 때문이다. 하노라고 하는 일일 수 있다. 시민의 발이니 지하철만이라도 시원하게 하는 게 뭐 나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반소매에 드러난 피부를 문지르면서 휴대폰을 보니 뉴스가 뜬다. 일본인 학자의 경고다. “도쿄사태는 새발의 피, 고리원전이 더 위험”…. 요즘 뉴스를 곰곰이 뜯어본다. 에너지의 관점으로 다양하게 읽히는 뉴스가 대부분이다. 한·중 정상회담, 일본의 ‘보통 국가’를 향한 헌법개정, 동아시아에서 벌이는 열강의 군비확장도 가까이나 멀리나 에너지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더보기
공짜 안주는 없다 스페인 술집을 흔히 타파스 바라고 부른다. 그냥 술과 커피를 파는 ‘바(bar)’인데 타파스를 판다고 해서 구별하고 있다. 이웃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유럽에서 타파스 바는 자못 선풍적이다. 간단하게 만든 여러 가지 요리를 곁들여 술마시는 문화다. 제철의 지역 재료를 써서 푸근한 손맛으로 요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에서도 이 요리를 배우러 유학을 가는 학생들이 있다. 그렇다고 요란한 요리는 아니다. 서민들이 즐기는 그야말로 소박한 요리의 대명사다. 타파스는 스페인어에서 ‘뚜껑’을 의미한다. 원래 ‘안주’라는 개념이 희박한 유럽에서 술 한 잔을 바에서 시키면 수수한 씹을 거리 정도를 곁들여주는 문화에서 타파스가 탄생했다. 술잔에 뚜껑처럼 얹어 놓고 먹는 빵이 바로 타파스 문화의 시초라는 것이다... 더보기
얼음의 시절 얼음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얼음가게는 멀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사오라고 시키면 한달음에 날아갔다. 얼음가게 가는 길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식당들은 ‘냉면개시’라고 써 놓은 붉은 깃발을 내걸고 손님을 끌었다. 복날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남자들의 눈빛이 수상해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얼음가게는 꼭 석유 판매와 겸업이었다. 우산과 소금을 같이 파는 격이랄까. 여담이지만, 이 냉온 겸업의 역사는 한번 취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얼음을 사러 가는 게 좋았던 건 시원한 얼음창고 때문이었다. 얼음가게가 학교 동무네였던 것이다. 아저씨는 기꺼이 창고에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딱 뭐랄까, 차가운 얼음의 기운이 피부에 닿으며 좁쌀만 한 소름이 쫙 끼쳤다. 그 기묘한 기분을 즐겼다. 아저씨는 쇠갈고리로 .. 더보기
프랑스서 만난 국산 우엉조림캔 한식의 위상이 달라지기는 하는 모양이다. 유명한 식당가이드인 등에 미국과 일본의 한식당이 근자에 연속으로 최고 식당의 상징인 별을 얻었다. 그저 불고기와 김치 정도로 알려져 있던 한식의 다른 얼굴을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위상 변화가 매우 구체적인 건 아니다. 여전히 한식은 중식과 일식, 동남아식의 한 변방 정도로 취급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촌 구석구석의 저변에 한식을 알고 사랑하는 기운이 번지고 있는 것도 맞다. 최근 프랑스의 한 작은 도시에 들른 적 있다. 공원에서 젊은이들이 맥주 안주로 먹고 있는 음식이 눈에 띄었다. 캔에 든 즉석식품인데, 웬일인지 낯이 익었다. 캔 표면에 한글이 써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1만㎞는 떨어진 이방에서 한국식.. 더보기
서울시의 저염식 대책 서울시청 옆에 좀 특별하게 생긴 신청사가 있는 건 다들 아실 테다. 이 건물의 생김새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적어도 쓰임새로는 높은 점수를 줘야 할 듯하다. 우선 이 공간의 지하 1, 2층에 부여한 이름이 ‘시민청’이다. 세상에 ‘시민’청이라니. 나는 서울시민으로 태어나서 살아왔지만 세금 낼 때 말고는 시민 대우를 별로 받아본 것 같지 않다. 우선 시민청에 들어서면 고압적으로 따져묻는 경비원이 없다. 이 기회에 말씀드리자면, 제발 관공서 출입할 때 ‘어디 가느냐’고 묻지 좀 말라. 만약 내가 테러범이거나 민원에 불만을 품고 공무원 멱살이라도 잡으러 가는 사람이더라도 사실대로 말하겠는가. “저, 총 몇 방 쏘고요, 그 자식 뺨을 후려치러 갑니다” 이럴 리가 있겠는가. 엄중한 경호와 무례한 위협은 전.. 더보기
싸고 푸짐한 ‘어묵의 추억’ 어려서 어묵(나는 왜 오뎅이라는 말이 더 혀에 붙는지) 반찬을 좋아했다. 살림 퍽퍽하던 시절, 기름기 적은 식단에 어묵은 반가운 존재였다. 어머니 말씀이 “애들 넷 도시락을 여섯 개씩 싸려면 싸고 빠른 반찬이 제일”이던 때였다. 어묵은 그저 양파와 간장을 넣고 조리는 게 전부였다. 노란 양은 도시락에 가득 퍼 담은 밥에 어묵과 김치로 허기를 메웠다. 여전히 어묵은 우리 밥상에서 싸고 푸짐한 효자 노릇을 한다. 고급한 입맛으로 다들 변해가도 어묵만큼은 옛맛이 최고인 듯하다. ‘옛날 어묵’이라는 상표를 붙이는 제품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어묵이 꼭 도시락 반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간식으로도 최고였는데, 시장에 가서 어머니가 하나씩 물려주는 ‘길쭉이’를 먹다보면 입가에 기름이 번질번질해졌다. 그때 어묵은.. 더보기
돼지고기, 삼겹살 말고도 맛있다 삼겹살이 너무 비싸 난리다. 어지간한 쇠고기보다 비싸다. 국산 삼겹살을 파는 거리의 흔한 고깃집들은 비명을 지른다. 세월호 참사 파장으로 손님이 줄고 재료비까지 올라서다. 우리 삼겹살 소비는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났다. 유럽의 삼겹살을 얼마나 많이 수입해대는지, 현지에서 일하는 후배 요리사가 “삼겹살 파동이 났다”고 전해올 정도다. 삼겹살을 소금에 절이고 훈제해서 양념으로 많이 쓰는데 재료비가 너무 올랐다는 것이다. 바로 베이컨이다. 삼겹살은 정말 맛있는 부위다. 기름과 고기가 교대로 차곡차곡 퇴적하듯 무늬를 그리고 있는 것만 봐도 군침이 흐른다.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너무 이 부위만 먹으니 문제다. 문득 전주의 한 술집이 생각났다. 유명한 재래시장인 남부시장에 있다. 이 시장은 ‘먹자’골.. 더보기
잊지 말자, 꽃게의 맛처럼 모처럼 기운을 내서 수산시장에 갔다. 입맛을 잃고 살던 아내가 “요새 게 철인데…”했다. 저 바다 끓고 넘쳐도 무심하게 고기는 잡힌다. 고기야 뭔 시절을 알겠는가. 속 모르는 세월과 달리, 바다는 어김없이 먹을 걸 잊지 않고 인간에게 돌린다. 어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한다. 기름도 유출되고, 중국 배들도 이 틈을 내서 더 많이 들어오는 까닭일까. 진도 앞바다가 마침 꽃게가 어지간히 올라오는 어장이라고 한다. 꽃게는 그쯤에서 연평도까지 길게 띠를 이루어 잡힌다. 꽃게는 먼 바다에서 놀다가 산란을 하러 연근해로 이동한다. 이때가 게가 많이 먹고 살을 찌운다. 산란을 해야 하니 생식소도 영양을 많이 얻는다. 우리가 게딱지를 벌려서 보는 노란 ‘알’은 실은 알이 아니라 생식소이다. 썰렁한 시장, 게 파는 단골.. 더보기
130년 중국요리의 진화 청요릿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중국식당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화려한 외식을 상징했다. 마치 당대에 프랑스요리가 그런 것처럼, 외국의 신기한 요리는 도입될 때마다 우리의 시선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짜장면이 대중화되기까지 중국요리는 어쩌다 한번 특별한 날이라야 만날 수 있는 고급 식탁이었다. 한국의 중국집에 채소 요리가 드문 것도 이런 역사를 반영한다. 기왕 청요리를 즐기는 마당에 흔한 채소 대신 고기를 시켜야 마땅했다. 특히 기름이 귀하던 시절, 센 불에 기름 넉넉히 둘러 튀기고 지지는 중국요리는 우리 혀가 최초로 맛보는 혁명이었다. 기름이라고는 감자나 무 조각에 살짝 발라 아껴가며 번철에 두르던 우리 식습관에서 튀김은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 언론사에서 일하는 후배와 쓸쓸한 시국의 소주 한 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