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수타면 중국음식점 경기가 예전같지 않다. 젊은이들은 중식을 값싼 배달음식으로 알고 있을 뿐, 다채로운 요리가 있다는 걸 잘 모른다. 저녁에 배갈을 곁들여 요리를 시켜놓고 모임을 갖는 이들도 크게 줄었다. 간편한 대용음식쯤으로 안다. 중국집의 화려한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세월이다. 예전에 중국집에 들어서면 면 치는 소리가 들렸다. 탕! 탕! 나무 반죽판에 놓고 치는 밀가루 덩어리가 이내 가느다란 국수로 뽑히는 광경을 주방 창문 틈으로 볼 수 있었다. 나무젓가락을 비벼서 부스러기를 털어내는 건, 한 그릇의 수타면을 기다리는 재미였다. 수타면이란 말은 본디 수납면(手拉麵)에서 온 것이다. 손으로 면을 늘려 만든다는 뜻이다. 반면 일본은 발로 밟아 만드는 족답면이 있다. 밟는다는 뜻의 답(踏)이다.. 더보기
서산냉이 봄에는 서해안에 먹을 것들이 많다. 벌써부터 군침을 삼키며 주꾸미를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그렇다면 봄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지금 주꾸미 맛이 제법이기 때문이다. 너른 들길을 끼고, 막 봄을 일구는 농부들을 바라보며 서해안으로 차를 몰았다. 힘 좋은 주꾸미가 서해안의 여러 어항에 들어온다. 전국으로 산 채 팔려나간다고 한다. 주꾸미는 먼바다에서 살다가 산란철이 되면 연안으로 붙는다. 주꾸미도 제 새끼는 의지할 데 없는 험한 바다에 던져두지 않는 것이다. 산소가 풍부하고 그늘이 있으며, 먹이가 있는 뭍 가까이 붙어서 알을 낳는다. 주꾸미 머리를 와작 씹으니 쌀알 같은 알들이 그득하다. 좁은 소견에 산란철에 이렇게 알을 먹어도 되나 싶지만, 맛은 고소하다. 배추와 바지락을 넣은 육수에 20여초쯤 두었다가 .. 더보기
족발 먹기 장충체육관이 새 단장을 하고 문을 열었다. 가까운 동대문운동장은 사라져버렸으나 이 체육관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안 그래도 서울운동장에서 이 체육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메카였다. 지금은 상암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서울운동장에는 축구장이 있었다. ‘국대’ 경기가 있는 날이면-차범근이 자신의 진가를 보인 곳도 바로 이곳-기마경찰까지 동원해서 인파를 정리했다. 위엄있는(?) 말이 천천히 주둥이로 인파를 밀어내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암표 장수가 돌아다녔고, 간식을 파는 리어카가 운동장을 모두 둘러싸기도 했다. 야구는 또 어땠는가. 고교야구라도 열리는 날에는 가까운 평화시장까지 행진하는 동문들로 미어터졌다. 교가와 응원가가 울려퍼졌고, 라이벌 학교끼리 장외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충체육관.. 더보기
MSG 냉면도 맛있다 이 땅에서 냉면 얘기 잘못 꺼내다가는 십자포화(?)를 맞는다. 다른 건 몰라도 냉면은 이른바 미식가의 자존심 같은 거다. 나는 요리사이니, 직접 만들어 먹어보기로 했다. 북한 책을 먼저 참고한다. 대개 두 가지 요리법이 나온다. 동치미나 김치에 고깃국물을 섞는 방법이 있고, 고깃국물과 ‘맛내기’(MSG)를 넣는 것이 핵심인 요리법이 어깨를 겨룬다. 고깃국물을 내는 것도 배합비율이 여러 가지다. 소, 돼지, 닭을 골고루 쓰는 것과 소와 돼지만 쓰는 것이 대종을 이룬다. 지금 막 동치미가 맛있게 익었으니,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삶아 국물을 섞어본다. 문제는 면이다. 냉면은 메밀을 많이 써서(보통 전분과의 비율이 7 대 3이나 8 대 2) 단단하게 반죽한 후 압력으로 내리는 것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가정에는 .. 더보기
두부요리 두 그릇 강릉까지 길도 좋아 두어 시간이면 내달린다. 두부 한 그릇 먹자고, 가는 길이다. 알려진 대로 강릉 초당에는 두부집이 많다. 본디 두부를 파는 식당이 아니라 대개는 가내 두부공장이었다. 이 지역은 전후에 두부를 만들어 팔던 전쟁 과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몽양 여운형이 해방공간에 이 지역에서 야학을 운영했고,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 학교 출신들이 전쟁 기간의 흉악한 정치상황에서 무고하게 처단되었다고 한다. 몽양의 제자이니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처벌했다는 것이다. 초당의 두부는 그래서 더욱 슬픈 음식이 아닌가 싶다. 토지 없고 남편 잃은 아낙들이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새워 만든 두부를 시내에 내다 팔면서 초당두부의 명성이 생겼다. 통학길 버스에는 두부 함지를 인 .. 더보기
돼지곱창을 씹으며 최근에 잡다한 음식이야기를 묶어 책을 한 권 냈다. 저자의 말을 쓰는데, 문득 중학교 친구들이 생각났다. 언제든 들르면 김치반찬 두 가지에 커다란 밥통-배삼룡이 선전하던 유니버설 전자밥통-하나를 몽땅 비우던 친구, 설탕과 마가린을 발라 한 줄짜리 식빵을 함께 먹어치우던 친구, 반찬이라고는 들기름에 볶은 묵은지가 고작이던 친구, 도시락반찬으로 늘 김치만 싸오던 친구. 녀석들이 생각나서 한 사람씩 호명하며 글을 쓰다보니 눈물이 났다. 그때 한 친구의 어머니는 황학동 중고시장에서 돼지곱창을 팔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비로소 음주면허를 받아 늘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돼지의 작은창자를 씻어서 당면과 갖은 채소, 매운 양념에 버무려 볶은 음식이었다. 값도 엄청 싸서 소주 두어 병에 안주를 먹어도 재수생 주.. 더보기
혹한의 맛 농사, 김 우리가 도시에서 안락하게 지내고 있을 때도 누군가는 먹이기 위해 생산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일하는 이들이 있다. 겨울바다의 낭만을 얘기한 이가 누구던가. 서울에서 가장 먼 정남진, 장흥의 바다에 와본다. 혹한에도 ‘농사’가 있다. 김 작업이다. 바삭하게 구워 고소한 김, 언제나 맛있는 김밥의 재료인 김은 겨울의 추위를 뚫고 만들어진다. 바다에 나갔다. 묵묵히 김을 뜯고 나르는 이들의 작업복 위로 파도가 튀어 그대로 얼어버린다. 바람이 귀를 잘라버릴 듯 매섭다. 바람소리가 거세어 옆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는 엄중한 작업환경이다. 김은 광합성을 한다. 대개의 해조류가 그렇지만 해를 봐야 자란다. 그렇다고 계속 햇빛을 잘 쬔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바닷속에 들어가 영양물질을 먹어 살찌.. 더보기
생선의 위험한 세계화 생전에 박완서 선생은 시장 가서 흥정을 안 하셨다고 한다. 깎는 것도 재미란 말에, 저 물건은 상인들에게 목숨일 텐데 목숨으로 재미 삼는 것 아니라고도 하셨다 한다. 멀리 유럽에도 그런 말이 책 속에 나온다. “당신이 사려는 건 생선이 아니에요. 사람의 목숨이지.” 대구 값을 깎으려는 손님에게 내비친 생선장수의 호소였다. 월터 스콧의 라는 책에 나와 있는 대목이라고 한다. 명태잡이 원양어선 오룡호 침몰 사건을 겪고 이 말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도대체 먹고사는 게 무엇이길래 그들을 더 차가운 바다에 묻었나 싶다. 이미 바다는 낭만과 미식의 젖줄로 칭송받기에는 너무도 황폐해졌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2048년에는 바다에서 모든 식용 가능한 어류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에이 설마, 하겠지만 이미 그 전조는.. 더보기
소주잔 부르는 과메기 과메기라는 지역 음식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전국적인 인기를 끌 줄 몰랐다. 홈쇼핑에도 등장한다. 웬만한 술집에서 겨울 안주로 나오기도 한다. 과메기의 주산지는 포항 구룡포다. 그런데 이 동네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이들도 으레 찬바람이 불면 과메기를 한 점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현지에서는 파시(波市)도 열린다. 파시란 특정 어획물이 대량으로 나올 때 열리는 현장 시장을 말한다. 조기나 고등어 파시란 말은 들어봤어도 과메기 파시라니. 이 음식은 만드는 것부터 입맛을 돋운다. “얼었다 녹았다 반복”한다고 말한다. 바다 덕장에 걸어 놓은 생선이 제 온도에 따라 낮에는 녹고, 밤에는 얼어가며 수분이 줄어드니, 그 건조 방법에서부터 먹고 싶은 욕망을 불러오는 것이다. 강원 인제 용.. 더보기
기름값이 오르면 기름값이 비싸서 난리더니, 이제는 부작용을 걱정하는 기사도 나온다. 원자재 펀드 하락이 어떻고 경기가 어떻다고 한다. 걱정도 팔자다. 기름은 퍼서 쓰면 쓸수록 고갈될 텐데 그걸 빨리 당겨 쓰자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기름은 한계가 분명히 있고 그 값은 언젠가는 오르게 되어 있는 물질이다. 보통의 생산품과는 다르다. 경기회복이 안되는 게 유가 하락 때문인 것처럼 말하는 신문도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들은 기름값이 오르면 또 원자재값이 올라 경기 상승에 부담이 된다고 할 사람들이다. 기름값이 떨어져서(실제 우리 체감으로는 오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정도다) 한겨울의 부담이 줄었다. 보통 먹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 겨울이 여러 가지로 힘들다. 난방비 부담에 재료비도 오른다. 아직도 사람들은 우리 .. 더보기
옌볜음식은 한식인가 1993년의 일이다. 어쩌다가 중국 옌볜에 가게 됐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당시 옌볜은 조그마한 도시였다.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어 감회가 큰 지역이었다. 나이든 한국사람들이 방문해 특별한 감회가 있었다. 바로 잃어버린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밥 짓는 연기를 뿜는 굴뚝, 구들장, 할머니들의 손맛, 페인트로 쓴 가게 간판과 낡은 운동화의 소년들…. 어제는 옌볜 음식을 다루는 한 세미나에 다녀왔다. 옌볜의 음식을 한식의 카테고리에 넣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떠나 넓게 보면 민족 음식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특이한 것은 옌볜 음식의 오늘에는 한식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이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귀국, 한식의 요리법이 현지 음식에 접목되었다. 그런데 현지 조.. 더보기
고객님, 호갱님 한때 한글날만 되면 두들겨 맞던 우리 언어 습관이 있었다. 식당에서 ‘시보리, 오봉’을 쓴다는 지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말을 들을 수 없게 됐다. 전설적인 코미디언 서영춘의 만담에서나 여전히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곱뿌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일본식 말이 살아 있을 뿐이다. 일제 잔재 청산 차원에서 우리 말과 글을 ‘정화’하려는 움직임이 길었다. 여전히 몇몇 전문가 집단에서는 일본식 용어가 쓰이고 있지만 우리말이 오랜 관습을 대체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 거꾸로 가는 경우도 있다. 서비스 업종에서 흔하게 쓰는 말인 ‘고객님’이다. ‘호갱님’이라는 풍자적인 용어도 바로 ‘고객님’에서 온 것이다. 일본어 잔재가 기세등등하던 시절에도 고객님이라는 말은 잘 안 썼다. 오랫동안 정겹게 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