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노인 요리사 오래된 식당을 찾아서 먹고 마시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한 그릇의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만든 오랜 역사에 내가 참여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에는 역사가 있지만, 내가 그곳의 주인공이 된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전시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애쓰는 분들에게는 송구하지만, 화석처럼 여겨질 뿐 생명력 있는 공간이 되기는 힘든 것이다. 그러나 식당은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박제는 없다. 이 공간과 파는 음식, 수저를 드는 사람들이 모두 그대로 하나의 생생한 역사다. 단돈 몇 천원을 내고 내가 바로 역사가 되는 흥분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된 식당을 찾아 한 술의 밥을 뜬다. 그런 식당을 노포라고 부르고, 경의와 애정을 바친다. 두어 해 동안 집중적으로 그런 식당.. 더보기
떠나보낸 자식 같은 김치 최근 호주 정부에서는 특별한 행사를 하나 열었다. ‘Invite the World to Dinner.’ 즉 전 세계 유명한 요리사, 요리 관련 저널리스트를 불러 한 편의 초대형 저녁 행사를 연 것이다. 호주 음식의 위대한 발전을 알리고, 관광 호주의 위상을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말하자면, 호주가 뛰어난 자연 풍광뿐 아니라 음식도 끝내준다는 자랑을 하러 연 모임이었다. 준비도 철저했다. 호주의 멋진 식재료와 포도주를 망라했고, 진행도 물 흐르듯 아름다웠다. 나는 말석 하나를 얻어 행사를 지켜보았는데,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치의 위상이었다. 남부의 아름다운 태즈메이니아 지역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는 호주의 최고 요리사 셋이 각기 다른 요리를 선보였다. 그중 마지막 방점을 찍.. 더보기
‘천의 얼굴’ 파스타 흔히 이탈리아는 매일 스파게티만 먹고 살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국토가 꽤 넓고 지역색이 강해서 음식문화도 다채롭다. 통일된 지 150여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탈리아다운’ 음식문화라고 해야 할 무엇도 아직 뚜렷하지 않다. 된장찌개나 김치 같은 국가나 민족적 음식도 내세울 만한 것이 드물다. 그나마 파스타가 전국적으로 먹는 음식인데, 소스로 지역의 색깔이 크게 달라진다. 치즈만 하얗게 뿌려 먹는가 하면 토마토소스가 끊어지지 않는 동네도 있다. 고명도 다채로워 올라가지 않는 재료가 없다. 선인장 열매를 넣는 남부 시칠리아 파스타, 멸치젓갈을 쓰는 나폴리 인근의 스파게티, 풍성하게 레드와인을 넣어 만드는 북부의 구릉지대 파스타, 과일을 넣어 만드는 파스타도 있다. 파스타란 정말 어떤 소스를 쓰는가에 따라.. 더보기
식사빵 간식빵 우리나라 제빵 시장이 대단히 커지고 있다. 프랜차이즈점을 운영하는 모 기업은 매출 규모가 웬만한 대기업을 웃돈다. 외국에 진출해 성과도 올리고 본고장에도 들어갔다. 우리의 빵 시장은 화교의 진출과 맥을 같이한다. 임오군란 이후 중국인들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빵집이 전해졌다. 흔히 개항과 함께 중국식당이 들어온 것으로 알지만, 사실과 다르다. 처음에는 빵집이 선도적이었다. 그 후에 자연스럽게 요리사가 들어와 식당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자장면보다 빵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그 시절의 빵으로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몇몇 지방의 중국식품점이나 식당에서 파는 계란빵이다. 소박한 음식이지만, 한·중 관계사의 아주 중요한 상징인 음식이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빵은 면모를 달리했다. 유럽을 .. 더보기
굴맛 굴값 외국 요리사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이유 중 하나는 굴 때문이다. 첫째는 환상적인 맛 때문이고 둘째는 그 값이다. A라는 이탈리아 요리사와 슈퍼마켓에 간 적이 있다. 굴 한 봉지에 2000원이라는 가격표를 보고 그가 물었다. “굴 한 개 가격인가, 한 봉지 가격인가?” 한 봉지(200g)라고 확인해주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양에서는 굴 한 개 값이다. 그렇다. 딱 한 개 값. 그와 노량진수산시장에도 들렀다. 껍데기 한쪽을 까서 파는 소위 ‘석화’ 40개를 1만원에 판다고 하자, 더 놀랐다. 유럽에서는 굴값은 차치하고, 40개쯤 까는 임금만 1만원이라는 것이다. 맛을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유럽의 유명한 굴보다 맛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의 말은 예의상 하는 칭찬이랄 수 있다. 그러나 .. 더보기
겨울 입구의 풍경들 날씨가 쌀쌀해졌다. 더운 음식이 생각난다. 냉면집과 메밀국숫집은 뜸해진 손님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질 무렵이다. 반면 펄펄 끓는 뜨거운 음식을 파는 집들은 날씨 특수를 기대하면서 식당 문을 열 것이다. 요즘엔 음식에 계절감이 옅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찬바람이 불면 속이 허해지고 무언가 충만한 음식이 그리워진다. 늘 결핍에 몸서리치던 날이었으니, 바람이 차가워지면 목덜미가 더 휑해지고, 마음도 시려졌다. 그럴 때가 있었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와 동태찌개 맛이 삼삼해지면 윗목에는 외풍 때문에 앉기 어려워졌고 그렇게 겨울이 슬슬 바람벽 사이로 들이밀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에 종로와 을지로 거리에서는 밤이 깊으면 하나둘 리어카 행상이 나와서 자동차 배터리로 불을 켜고 독특한 음식을 팔았다. 순두부였다. 요.. 더보기
소금이 뭔 죄야 최근에 흥미로운 뉴스 몇 개가 있었다. 소금에 관한 것이었다. 국정감사에서 아기들 분유에 소금 함유량이 높다는 지적이 나와 분유업계는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분유에 소금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아기들도 맛에 대해 반응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음식은 약간의 소금을 넣느냐 마느냐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진다. ‘음식을 요리한다’를 다른 말로 하면 ‘간을 본다’이다. 모든 복잡한 요리 기술에 대응하는 한 낱말이 ‘간’일 만큼 소금은 최고 중요한 양념이다. 된장 간, 간장 간, 고추장 간 같은 여러 가지 맛내기 간도 결국은 소금으로 한다는 뜻일 뿐이다. 분유에 나트륨이 기준치가 초과했다면, 정해놓은 법률을 어긴 것이다. 그러나 아기들도 소금을 먹어야 하고 그것이 맛의 기준이 된다는 중요한 의미 하나가 숨겨져.. 더보기
제주 순대의 맛 제주도의 음식을 거론할 때 돼지가 빠지지 않는다. 여러 연구에 의하면, 오키나와와 폴리네시아 지역을 포괄하는 태평양 문화권의 영향이라고 한다. 이제는 먹을 수 없지만 집집마다 기르는 이른바 ‘똥돼지’라는 특유의 토종 돼지는 제주의 상징이었다. 작고 단단한 몸집의 이 돼지와 유사한 것들이 폴리네시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돼지를 잡는 건 제주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다. 결혼하면 신부·신랑집에서 각기 사흘간 잔치를 하는데, 돼지 잡는 것이 핵심이다. 제주에서는 도감이라고 하여 돼지고기를 썰고 나누는 역을 하는 이들이 있다. 노련한 도감을 기용하는 것이 잔치의 핵심이라고 할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영화 는 일본에 정착한 제주 출신 인사의 일대기를 다룬다. 여기서 돼지 잡는 장.. 더보기
음식배달앱 우스갯소리로 음식 배달이 성한 건 우리가 ‘배달의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랬다. 사건사고를 다루는 사회면에 배달 음식값으로 시비가 붙어 배달원이 폭력죄로 잡혔다는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도 있다. 냉면배달원들이 집단으로 조합을 만들어 쟁의에 돌입했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다. 굳이 여러 문헌을 뒤지지 않아도 소설에도 나온다. 서울의 1930년대 모습이 살아 있는 박태원의 이 그것인데, 배달하는 음식의 풍경이 등장한다. 인천의 자장면 박물관에는 각기 다른 소재로 만든 배달통이 진열되어 있다. 나무로 시작해서 알루미늄 제품까지 변천사를 볼 수 있다. 특히 경량화시킨 알루미늄 배달통이 개발되면서 한국의 배달음식업이 크게 성장했다는 말도 있다. 요즘은 플라스틱 제품은 물론, 속에서 보온재를 댄 콤팩트한 제.. 더보기
가을 꽃게 꽃게 금어기가 풀렸다. 기다렸다는 듯 신문에 기사가 쏟아진다. 가을꽃게, 실하고 맛있단다. 값도 좋다는데, 정작 시장에서는 물건 보기가 어렵다. 업계에서 들으니 마트들이 싹쓸이를 해서 일반 시중에 물건이 별로 풀리지 못한다는 거다. 아닌 게 아니라, 주요 마트는 꽃게를 놓고 심하게 경쟁을 하고 있다. 이른바 미끼상품이다. 작은 것이라도 ㎏당 8000원이라면, 도매시장보다 싸다. 마트가 도매시장까지 위협할 줄이야! 역사적인 종로 육의전 이후 이어온 장마당의 역사는 침통하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 서운함이란! 시장에서 크고 자란 우리들의 아쉬움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도 가을에 꽃게 한 점, 내 입에 들어오겠지 기대는 하고 있다. 꽃게는 서울에서 만만한 해물이 아니었다. 주로 서해안.. 더보기
‘뽀얀 국물’에 빠지다 영화 덕인지 서울에 돼지국밥집이 생겨나고 있다. 부산과 경남 출향 인사들의 기대 수준에는 못 미칠지 모르나, 그래도 서울에서 돼지국밥이라니, 반가운 일이다. 어떤 식당에는 ‘부산식 순대국밥(돼지국밥)’이라고 써놓았다. 아직 역부족(?)인 걸까. 어쨌든 가히 ‘뽀얀 국물’의 전성기다. 이 국물을 보고 있으면, 몇 가지 일관된 그림이 그려진다. 설렁탕-순대국밥-돼지국밥-고기국수-나가사키짬뽕이다. 서울이 원조인 설렁탕부터 남쪽으로 가면서 뽀얀 국물의 굵은 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남한에서 순대국밥은 경기도, 충청도의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제주도로 가면 고기국수다. 전후에 미국산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생겨난 일종의 변종 음식이다. 이 국수는 요즘 올레 바람을 타고 제주의 한 상징음식처럼 되었다. 심지어 지.. 더보기
수도의 행보 ‘시커먼 빵 한 조각’ 이탈리아에 있던 시절 한 수도원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과연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어떻게 식사하는지 궁금했다. 농담 섞어 말하면, 이탈리아 교도소나 군대에서도 스파게티를 줄까? 이런 궁금증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코스를 갖춰 제대로 먹는 걸 좋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니, 신부나 수도사들도 그렇게 먹을까, 이런 의문도 있었다. 도 닦는 분들이므로 우리의 선방처럼 검박한 식사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식사가 나오는데, 제법 양이 많았다. 요리는 소박했지만 국물요리 대신 와인을 마시는 그들의 풍습대로 술도 곁들여 나왔다. 선방은 육식금지이므로 당연히 고기가 나오지 않는데, 비슷한 수도사들이 고기가 충분한 식사를 하는 것도 이채로웠다. 불교를 아는 동양인의 시각으로 그들의 식사는 ‘검박’한 소식이 아니라 좀 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