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사재기 라면과 꽃게 라면 요 며칠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정치적 긴장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닌데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 와중에도 먹는 얘기는 뉴스를 탔다. 라면 사재기를 둘러싼 소극도 있었고, 유소년 축구 때문에 평양에 머무르는 기자가 송고한 ‘진짜’ 평양냉면 시식기도 눈길을 끌었다. 남북 대치 국면을 언급하면서 손석희 앵커는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내 글을 인용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냉면에 관한 글이었다. 냉면으로 남북 교류 사업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내 제안이었고, 손 앵커는 아마도 이 냉면처럼 말랑한 소재로 남북이 만나면 훨씬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중으로 소개한 듯하다. 사람은 먹어야 살고, 남북이 죽네 사네 하는 갈등의 본질도 결국은 먹는 문제다. 북쪽에서 포문을 개방한 사진을 싣고, 서해 5도를 공.. 더보기
냉면 통일 이탈리아에서 친구가 왔다. 한국에서 먹어본 것 중에 인상 깊은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대뜸 “냉면”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짠 아이스크림에 담긴 면”이라고 덧붙였다. 여러 한국 음식을 먹었는데, 냉면만큼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도대체 왜 그토록 차가운 육수에 면을 말아 먹느냐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도 국물에 넣어 먹는 면이 있다. 냉면처럼 고깃국물에 가느다란 스파게티를 말아서 먹는다. 냉면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국물이다. 차가운 국물이 아무런 맛이 안 나서 무슨 맛인지 잘 느낄 수 없어 먹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차가운 음식은 맛을 내는 분자가 활성화되지 않아 코와 혀가 맛을 잘 알아채기 어렵다. 그래서 냉면처럼 이가 시리게 차가운 음식은 세계적으로 없다고 한다. 일본의 ‘히야시 우동’이.. 더보기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계란의 운명 짚으로 엮은 계란 꾸러미를 최근에 본 적이 있다. 일종의 복고다. 실제 유통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고, 멋이다. 동네에서 얻은 계란이 가겟방에 나오던 시절에는 짚으로 엮어서 냈다. 짚이 사라지고 계란의 출처도 사라졌다. 이제는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고, 닭이 낳는 것인지 아니면 알 낳는 기계의 생산품인지 아는 이가 없다. 종이팩에 담겨 제각기 그럴듯한 선전문구에 가려져 마트에서 팔린다. 더러 좋은 계란이라고 ‘목초를 먹여 기른 닭이 낳았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어미 닭은 목초 말고 뭘 먹는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사서, 무심하게 열량과 콜레스테롤을 따져 찜을 하거나 팬에 지진다. 저럴 바에야 온전히 둥그런 계란 모양을 하고 팔릴 일도 없겠다 싶다. 삶은 채 냉장해서 팔아도 그만이고, 노른자가 무서운.. 더보기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설탕 무죄 백종원씨가 설탕에 대해 얘기하면서 ‘설탕무죄론’(?)이 나오고 있다. 나더러 묻는다면, 제한적으로 무죄 쪽이다. 물질이 무슨 죄가 있나. 그걸 쓰는 사람이 문제지. 설탕은 ‘3백 유해론’의 원흉처럼 취급된 적도 있다. 흰 쌀밥, 소금, 설탕. 이 세 가지의 ‘하얀’ 물질이 몸에 나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물질 자체로는 과학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 과도하게 먹는 것이 대개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문제 제기는 공포를 일으킨다. 이를테면, 흰 설탕이 나쁘다고 하여 황설탕을 쓰는 경우가 있다. 공정을 알게 되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알게 된다. 황설탕은 대개 이미 만든 설탕에 황색 당밀 등을 입혀서 가공하는 것이다. 흑설탕도 마찬가지다. 캐러멜 등을 넣어 검게 가공하는 설탕일 뿐, 더 건강하거나 ‘.. 더보기
고기의 추억 지금처럼 무더운 날, 옛날의 추억 한 자락이 피어오른다. ‘마이 카’도 변변한 대중교통도 없던 때다. 사십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는 불고기를 재고, 돗자리와 짐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북한산 계곡으로 피서를 갔던 것이다. 조금 사는 집들이 만리포니, 연포해수욕장이니 하는 곳으로 갈 때 우리의 피서지는 멀지 않은 북한산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걸어올라가면 사람이 적었고, 그래서 기를 쓰고 계곡을 탔다. 누이들은 커다란 수박을 들고 올라가느라 땀깨나 흘렸던 것 같다. 맞춤한 물웅덩이가 있는 곳에 짐을 풀었다. 수박을 띄워 놓고 아이들은 그대로 물에 들어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속에 몸을 담그면, 더위는커녕 이가 딱딱 시리게 추워졌다. 물은 또 얼마나 맑던지. 지금처럼 생수 같은 걸 구할 필요도 없었다... 더보기
육개장 복더위에 도시 곳곳에는 냉차장수가 있었다. 사카린을 치고 보리를 끓여 만든 냉차 한 잔에 10원을 받았다. 두어 잔을 마시면 배탈이 나곤 했다. 유리나 투명 아크릴로 만든 커다란 냉차용기를 리어카에 싣고 “시원한 냉차요!”를 외쳤다. 차가운 미숫가루를 파는 노점도 있었고, 아이스케이크를 파는 가게 앞은 아이들로 문전성시였다. 탈수기인 ‘짤순이’를 닮은 기다란 냉각보존기에 조잡한 비닐 포장을 한 아이스케이크와 빙과를 가득 담고, 위에는 소금 뿌린 얼음을 채운 노란색 고무주머니를 얹어놓았다. 빙과를 빨면 더러 고무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소금물의 찝찔한 맛이 났다. 용돈이 생기면 빙과를 입에 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비닐주머니에 빙과를 담아 얼린 ‘아이차’가 득세했고, ‘쭈쭈바’가 출시돼 경쟁구도를 만들었다. 식.. 더보기
방송에서 백종원씨가 쓰는 중국식 식도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방송이 참 대단하다 싶다. 중국요리 전래 역사 130여년 동안 쓰고 있던 칼을 이제야 대중이 주목하다니! 우리나라는 다른 지역의 화교와 달리 산둥 사람들이 많다. 1882년 중국과 불평등협정을 맺은 후 초기에는 광둥과 상하이의 상인들이 몰려오다가 일제강점기 내내 산둥 지역에서 노동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화교는 원래 세 가지 칼을 잘 다뤘다고 한다. 이발사의 면도칼, 재단사의 가위, 그리고 요리사의 칼이었다. 이를 두고 ‘산바다오(세 가지 칼)’라고 하여 그들의 높은 손기술을 의미했다. 실제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화교가 하는 이발소와 양복점이 전후에도 꽤 있었다고 증언한다.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에 중국집이 잘되면서 화교 식당이 엄청.. 더보기
스타 셰프 후배 요리사는 이른바 ‘스타 셰프’다. 그에게 찾아오거나, 메일을 보내는 청소년들이 있다고 한다. 질문이 다양하다. 조리법을 묻는 고전적인 내용도 있고 요리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묻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그가 답답해하는 질문도 있었다. 스타 셰프가 되려면 어떻게 해요, 방송에 나오려면 무엇을 잘해야 하죠? 이런 것들이다. 나도 똑같이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스타 셰프가 어디 있어요? 연예인이 있는 거지.” 관련된 보도도 나오고 있다. 한때 연예인 지망생이 늘면서 관련 기사가 나오고, 사회적 논란이 거듭된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연예인 지망 열풍을 취재한 기사의 핵심은 이렇다. 100명 중의 1명이 연습생이 되고, 다시 10명 중의 1명이 데뷔하며, 그 후에도 고작 900㎉의 열량을 공급받.. 더보기
다시 생각하는 IMF의 공포 지난번에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로 자영업에 심각한 위기가 올 것이라는 글을 썼다. 그 예상이 들어맞지 않기를 바랐다. 불행히도 현실이 되고 있다. 예약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고, 신규 예약은 없다. 심리적 공포가 더 큰 문제라고 해도, 사망자와 확진자가 속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침내 집권당 대표가 곰탕집에 가고, 대통령은 시장에 들러 메시지를 전할 지경에 이르렀다. 추경 조기 집행 얘기도 나온다. 문제는, 이 사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함이다. 메르스 확산에 대한 모델도, 예측도 다 빗나가고 있다. 당장 먹고사는 현장에 직격탄이 떨어지고 있다. 요즘 식당은 때아닌 휴가 바람이 분다. 놀고 있으니, 여름휴가를 당겨서 집행하는 것이다. 전국이 메르스에 벌벌 떨고 있는.. 더보기
우래옥 냉면 1970년대 후반 중학생 시절에 학교 옆에 있는 창경원에 자주 갔다. 당시 비원은 개방하기 전이었고, 창경원은 일제에 의해 공원으로 바뀌어 그때까지도 동물과 놀이기구가 있었다. 물론 낙타도 있었다. 봄에는 버찌를 따 먹으러 갔고, 가을에는 백일장을 치렀다. 이미 철거된 후이지만, 창경원 앞에는 전차가 다녔다고 들었다. 그 전차 얘기를 다시 들은 건 시내 굴지의 북한식당 우래옥의 김지억 전무에게서다. 1962년에 입사해 올해로 53년째 월급을 받고 있는 국내 최장수 ‘근로소득자’이기도 한 그는 옛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낸다. 1899년 처음 생긴 서울 전차는 1968년 11월 없어지기 전까지 노선을 계속 확장했다. 그중 아주 오래된 노선이 돈암동과 을지로4가를 오갔다. 바로 을지로4가 앞에 우래옥이 있었고,.. 더보기
‘메르스, 식당, 자영업’ 각기 생업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상이다. 이 좁은 땅에서 돈 버는 이들 가운데 셋 중 하나는 자영업자이니, 특별히 식당업자가 더 힘들 것도 없다. 다들 옛 시처럼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하는 심정이다. 이런 판국에 메르스가 덮쳤다. 정확히 말하면, 메르스에 대한 무책임한 당국의 대응이 더 무섭다. 벌써 식당 매출이 줄고 있다. SNS 친구들의 다수가 식당업자인데, 악 소리와 곡소리가 들린다. 잘해야 서너 달 이러고 말 텐데 엄살 아니냐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식당은 대개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산다. 두어 달만 매출이 쑥 빠져도 방법이 없다. 이미 더 이상 물러설 것도 없는, 문자 그대로 탄광 막장에 들어간 듯한 식당들에는 치명타다. 식당뿐 아니다. 동네 주택가에도 한 집.. 더보기
금값 삼겹살, 서민 주름살 말이 되는 꼴로 하면 세겹살이 맞는데 왜 ‘삼’겹살이냐,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이 부위를 좋아하게 됐느냐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먹는 일에 대한 관심이 요즘처럼 치솟는 때가 따로 없었으니, 임금님 밥상도 아니고 서민들이 먹는 삼겹살에 대한 기원과 풍속사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원래 삼겹살을 좋아했던 개성 사람들이 그쪽의 주산물인 ‘삼(蔘)’을 넣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돈다. 고기 산업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보면, 1970~1980년대 대일 수출 때문이라고 한다. 산과 바다에서 잡고 기른 것도 많이 수출했는데, 그 중 돼지고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이 경제호황기를 맞으면서 고기 소비가 급속도로 늘었고, 이때 한국과 이해가 맞아떨어져 등심과 안심 부위의 수출이 크게 늘었다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