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기사식당 맛있는 집을 찾아내는 몇 가지 요령 중에 ‘기사식당’을 가라는 내용도 있다. 입맛 까다로운 운전기사들이 좋아하는 곳이니, 대개 먹을 만하다는 평을 듣는다는 것이다. 실제 그런 면이 있다. 운전기사들이란 기동성이 있으니, 일부러 맛있는 곳을 찾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기사식당은 80년대 호황기에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 서울의 대표적인 업종이다. 기사식당이라고 따로 법적 분류를 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차를 세울 공간, 빠른 서비스, 혼자서 시켜도 부담 없으며 단백질과 채소, 곡물이 적당히 어우러진 영양을 담보하고 있다. 여기에 한때 기사식당에서만 이루어지는 독보적인 서비스가 있었다. 동전 바꿔주기, 장갑 같은 소모품 판매, 세차 서비스, 커피와 요구르트 서비스였다. 누룽지맛 사탕이나 박하사탕을 .. 더보기
감잣국의 전설 노동자의 음식이라면, 흔히 국밥이다. 빨리 먹고 얼른 일할 수 있는 음식이다. 해장국도 국밥의 하나다. 고깃점 대신 뼈로 끓였다. 소뼈와 선지, 우거지를 넣은 해장국이 서울과 인천에서 유행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이런 음식이 인기를 끌었다. 인천은 개항도시였고, 서울과 함께 전국에 두 개밖에 없는 미두취인소(쌀 선물거래소)가 사람과 돈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돈과 물자가 몰리면 노동자들도 많아진다. 허룩한 속을 한 그릇의 뚝배기로 달랬다. 소 말고 돼지뼈로도 해장국을 끓였다. 흔히 감자탕이라고 부른다. 소뼈 해장국과 달리 별다른 역사적 기록이 없다. 옛 신문을 봐도 감자탕은 일제강점기까지 감자로 만든 설탕(감저당·甘藷糖·전분에서 당을 추출해낸 것)을 뜻했다. 1970년대 초반에야 감자탕이라는 기록이 보이.. 더보기
밴댕이 골목의 역사 경인선 전철의 끝은 인천역이다. 그런데도 인천 토박이들은 ‘하인천역’이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제일 끝 역이기도 했고, 상인천역이 과거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구별해서 불렀던 것 같다. 인천역을 끝으로 해서 이어지는 인천의 ‘원도심’은 개항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본디 한적한 어촌이었던 이 지역이 개항의 물결을 타고 격랑의 세월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일본인들은 항구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날랐고, 박래품(舶來品)으로 상징되던 서구의 새로운 물량이 쏟아져 들어왔다. 임오군란의 분노한 군인들을 피해 일본 군사고문단이 도망친 항구도 이곳이고, 청의 장수 오장경이 수천의 병사를 이끌고 진입한 곳도 여기다. 개항은 조선의 운명을 뒤바꿔놓았고, 여기 역사가 새겨졌다. 해방 후 인천은 수도권의 제일 중요한 항구로.. 더보기
명란과 식민의 역사 어린 시절에 내가 살던 서울 한 동네에서는 부잣집 밥상의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우선 밥이다. 하얀 쌀밥, ‘아키바레(추청)’ 품종의 일반미로 지은 윤기 도는 밥이 나왔다. 통일이나 유신벼(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름도 대단하다 싶다) 밥을 먹는 집이 대다수였으니, 아키바레 밥은 부잣집의 필수요소였다. 다음으로는 김이다. 윤기 흐르는 김구이나 생김이 겨울에 늘 밥상에 놓이면 역시 부자의 상징이었다. 소고기 장조림도 그랬다. 한번은 충격적인 음식을 먹었다. 비릿하면서 달콤하고 짭짤한, 발그레한 어란이었다. 바로 명란. 지금도 비싸지만 당시도 부자가 아니면 밥상에 자주 올릴 수 없었다. 뜨거운 일반미 밥 한 술에 명란을 척 올려서 입에 넣었을 때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부잣집 아들 내 친구는 아예 명란을 잘.. 더보기
봄나물 강원도 평창 가리왕산에 다녀왔다. 어떤 때는 5월에도 눈이 온다는 깊은 산중인데,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올림픽 스키 슬로프를 만든다고 대규모 공사가 벌어져 앓고 있는 산이다. 안 그래도 오가는 고속도로를 넓히는지 중간 중간 막혔다. 요즘은 화전(火田)이 금지되어 있지만 산에도 농민이 있다. 특용작물 중심의 농사를 짓는다. 아루농장이라는 젊은 농부의 밭이 거기 있었다. 밭이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적절치 않다. 산비탈에 그저 씨 뿌리고 퇴비나 주는 게 전부다. 화학비료를 주면 오히려 뿌리가 썩는 나물도 있어서 자연농법 중심으로 많이 기른다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희한한 산나물도 이 비탈에서 재배된다. 능개승마, 지장가리(풀솜대) 같은 것들이다. 어린 싹을 먹기에는 지금이 딱 좋은 철이라고 한다. 명이나물도.. 더보기
‘해썹’, 누구 좋으라고 예전 정권에서 이른바 여론 환기용으로 많이 쓰는 수법이 바로 불량식품 때려잡기였다. 학교 앞 떡볶이 좌판과 심야 포장마차들이 단속반에 걸려 벌금 맞고 ‘구루마’를 압수당하기 일쑤였다. 농약 콩나물이니 석회 두부니 하는 언론의 과장 때문에 군소 업체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먹거리 안전에 대한 시민의 불안 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해서 민심을 조절하곤 했다. 그것은 요 근래 정권에서도 다르지 않다. 대표적 불량식품 추방 대상에 떡볶이를 넣고는, 반대로 한식세계화 첨병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막대한 지원금까지 줘가면서 말이다. 해썹(HACCP)이 말썽이다. 관계자 말고는 잘 모르던 이 말이 떡볶이 좌판 아줌마에게는 생존의 언어가 될 모양이다. 정부에서 2017년까지 순대 떡볶이 같은 길거리 음식도 해썹 인증을 받아야.. 더보기
설탕 원죄론, 방향을 잘못 잡았다 당이 시끄럽다. 선거철 정당(黨)은 아니고, 당(糖)이다. 우리가 음식을 너무 달게 먹고 있으며, 당이 건강에 안 좋다는 문제 제기다. 그러나 당은 우리 생명의 기본 조건이다. 당이 없으면 죽는다. 설탕 안 먹으면 죽는다고? 물론 설탕도 당이지만, 여기서는 세포의 에너지원인 당을 말한다. 같은 당이라도 어떻게 섭취하는가를 놓고 봐야한다. 청량음료와 가공식품, 과다한 곡류 섭취 같은 당이 문제다. 심지어 과일도 많이 섭취하면 당을 ‘올린’다. 중년여성의 지방간은 주요인이 과일 때문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당 문제는 유명한 텔레비전 요리사 백종원씨 때문에 촉발됐다. 과다한 설탕 섭취에 대한 지적은 늘 있어왔다. 그가 프로그램에서 ‘설탕 투하’를 즐기면서 반작용으로 그 위험성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셈이다.. 더보기
멍게의 추억 봄에 입맛도 깔깔하여 멍게 좀 사서 김과 참기름을 뿌려 덮밥을 해먹었다. 멍게의 부드럽고 여린 살에서 좋은 향이 난다. 지금부터 맛이 좋을 조갯국을 곁들였다. 멍게는 아직 철이 이른데 깊은 맛이 제법 들었다. 멍게 특유의 향은 익히면 기분 나쁜 냄새로 바뀐다. 그래서 멍게는 탕도, 국도 끓이지 않고 대개 날로 먹게 마련이다. 요리사들은 희한한 음식을 잘 해먹는다. 늘 이런저런 재료를 다루니 융통성이 좋다. 멍게와 해삼을 넣고 식초를 넉넉히 쳐서 미역냉국을 만들면 아주 맛있다. 이탈리아는 수산시장이 잘 발달해 있다. 해안가 도시에는 한국처럼 싱싱한 생선을 파는 시장이 손님을 부른다. 그런 시장을 많이 다녀봤지만 멍게는 못 봤다. 생선을 날것으로 잘 먹지 않는 그네들의 관습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해삼은 ‘바.. 더보기
봄에 먹는 일 남도에는 계절이 일찍 들었다. 꽃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겨울 꽃인 동백과 매화가 여전한데 개나리가 노란 잎을 피워냈다. 남쪽에서 온 훈풍이 볼을 간질인다. 남쪽 바다는 잔잔하게 일렁이며 부드럽게 몸을 낮췄다. 하얀 부표를 띄운 바다는 안쪽에서 무럭무럭 무언가 생물을 키워내고 있다. 언젠가부터 시중의 미식가들이 계절의 별미로 챙기는 도다리쑥국 한 그릇을 받았다. 이 국은 통영이 유명하지만 남도의 많은 지역에서 먹는 봄의 시식(時食)이다. 남해와 삼천포, 고성, 창원에서도 잘하는 집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겨우내 바람 흠뻑 맞고 자란 여린 쑥이 도다리 뼈가 풀어낸 달콤한 국물에 녹아 있다. 한 숟갈, 국물을 뜬다. 바싹 마른 논에 첫 물꼬를 열 듯, 몸이 활짝 열린다. 천천히 젖어드는 몸을 느낀다.. 더보기
식어버린 ‘한우 사골’ 아내가 커다란 곰솥에 곰국이나 사골을 끓이면 덜컥 겁이 난다는 유머가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렇게라도 사골이 많이 팔렸으면 하는 게 요즘 축산 쪽의 희망이다. 사골은 오랫동안 비싼 값을 유지했다. 사골은 곧 영양 보충의 대명사였다. 사골이란 소의 네 다리뼈를 말한다. 모두 8개의 사골이 한 마리의 소에서 나온다. 사골은 젤라틴이 많아 국물이 잘 나오고, 진했다. 인기가 높았다. 몸보신하면 사골이었다. 명절에 백화점은 물론 시장에서 사골이 포장되어 팔렸다. 인기 선물 품목이었다. 허한 영양 부족의 시대에 사골은 귀품이었다. 황소 사골, 그중에서도 앞다리 쪽 부위가 특히 귀했다. 체중을 버티는 앞다리에서 더 좋은 국물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정신적인 면도 있었다. 밭 갈고 온갖 무거운 것을 거뜬히 운.. 더보기
선술집 순라길 어렸을 때 서울 종로 낙원동 근처는 정말 ‘낙원’이었다. 근처 파고다공원에서 소일하던 할아버지들 틈에서 해장국 한 그릇을 싸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난 집’ ‘이름난 집’이라고 해서, 어쩌면 정식 상호도 아니었을 두 해장국의 맹주가 있었다. 깍두기 양념이 얕고 국맛도 대단한 건 아니었다. 바로 값이었다. 헐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아니 이렇게 받고도 가게가 굴러가?” 뭐 이런 반응들. 거기 오는 이들에게는 묵직한 가격일 수도 있었겠지만. 파고다공원은 이미 구한말 이후에 노인들의 주요 휴식 공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가벼운 주머니에 한 그릇 끼니를 해결해야 하고, 그 수요는 주변에 싼 밥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에 명동과 을지로, 충무로를 일인들에게 내준 민족의 시.. 더보기
참치눈물주 그 옛날, 갑자기 참치캔이라는 환상적인 통조림이 동네슈퍼에 깔리기 시작했다. 고작 꽁치통조림이 진열되어 있던 곳에 모양도 깜찍하고 이쁜 참치의 등장은 눈길을 끌었다. 기름기 둥둥 뜨고 비린 고등어통조림 따위는 갑자기 촌스러워졌다. 하얀 속살의 참치를 가지고 만드는 온갖 요리가 탄생했다. 분식집 메뉴도 나왔다. 참치김치찌개는 마치 100년은 된 음식처럼 식당마다 팔아댔다. 김치에 소시지가 들어가서 생겨난 부대찌개를 시샘하듯, 참치는 김치와 궁합을 맞추었다. 언젠가 전방 군부대에 갔더니 군용 식량으로 공급되고 있을 정도였다. 바야흐로 온 국민의 식량이었다. 다이어트용으로, 샐러드감으로, 100년 역사의 김밥에 첫손가락 꼽는 속이 되었다. 지방과 단백질 부족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에게 참치는 멋진 세례였다. 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