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포도맛, 폭염 우주의 특징 중 하나는 ‘예측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더워도 틀림없이 가을이 온다. 절기는 반복되며 더위는 서리를 예고한다. 더위를 견뎌내고 우리는 가을을 맞을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맛을 응축한다는 뜻인데, 서늘한 가을의 과일 맛은 여름의 폭염에서 비롯한다. 폭염이 맛을 과일 안에 깊게 응축시키고 있는 셈이다. 멀리 남원의 포도밭을 찾았다. 땡볕에서 농민들이 수확을 시작하고 있다. 지금부터 맛이 들었으며, 아무래도 추석 전에 가장 맛있을 것이라고 한다. 전국 포도 명산지의 다수는 특별한 기후를 타고났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할수록 맛이 좋다고 한다. 해발 고도가 있는 산간이 유리하다. 밤에 더위가 식으면, 과일도 스트레스가 풀리고 쉴 틈이 생긴다. 밤의 선선한 기온은 과일이 더 단맛을 농축하려.. 더보기
김영란법과 한우 김영란법이 합헌 결정을 받으면서 한 장의 사진이 화제에 올랐다. 한우 생산자 단체에서 5만원 이하에 맞추어 초라해진 한우선물세트 모형을 들고 항의하는 장면이었다. 선물세트 시장이 제법 큰 몫을 차지하는 한우 생산자로서는 매우 심대한 타격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안 그래도 한우 가격이 치솟고, 경기 부진으로 한우 판매가 어려운 상황에서 더 큰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한우는 2012년부터 가격폭락이 이어지자 어미 소 도축 등으로 방어하면서 이미 가격 상승이 예견되어 있었다. 정부로서는 한우 가격 상승에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 수입 소나 돼지고기, 닭고기 같은 대체재를 믿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에 한우값이 얼마나 떨어졌냐면, 군대 급식에도 한우를 쓰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사육농가에서 사료값을.. 더보기
홍천농고 계란 지난 7월13일자 강원일보에는 작은 기사가 하나 실렸다. 홍천농고가 국비 지원을 받아 전문농업인학교로 발전하게 된다는 게 요지였다. 기사에 의하면 국비가 51억원까지 투입된다고 한다. ‘창조농업 선도학교’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농업은 국가의 근간이라는 말을 차치하고라도 이렇게 국가에서 강력한 지원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뉴스와는 달리 우스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이 학교에서 생산한 계란의 판로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강원도민일보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요지는 이렇다. 학생이 실습하는 양계장에는 2500마리의 산란계가 있다. 그래서 매일 2000여개의 계란이 나오는데, 이것을 개인에게 팔면 불법이 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다. 홍천농고 계란은 지역에서도 품질이 .. 더보기
속초의 여름맛 ‘포켓몬 고’인가 하는 게임 때문에 속초의 숙소가 동이 났다고 한다. 속초를 생각하니 입맛이 돈다. 우선 바닷물에 담긴 성게알이다. 본디 알은 아니지만 그렇게들 부른다. 노란 성게알이 바닷물에 담겨서 중앙시장 좌판에 나와 있었다. 숙소에 가지고 와서 참기름에 상추나 뜯어 넣고 썩썩 밥을 비볐다. 그냥 숟가락으로 떠서 술안주를 해도 맛있었다. 해녀나 머구리라고 부르는 잠수부가 채취한 것이다. 요즘은 성게도 양식이 된다. 귀한 것은 어떻게든 만들어내는 재주를 가진 게 사람이다. 물론 예전에는 다 자연산이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속초의 여름 진미였다. 성게알을 물회로 잘 만드는 집이 있었다. 해삼과 물가자미를 썰어넣고 푸짐하게 담아냈다. 그 집은 요새 문자 그대로 ‘빌딩을 올렸’다. 번호표를 받아서 들어간다고.. 더보기
옥수수, 감사하며 먹기 어려서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 허기를 자극하는 내용이 꽤 많았다. 국어시간에 할머니댁을 방문하는 손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구마를 쪄서 먹는 대목에서 옆구리가 아플 만큼 배가 고팠다. 노래는 안 그런가. 하모니카 옥수수 말이다. 더러 강원도쪽 친구들이 감자랑 옥수수 말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는데, 이해는 되더라도 ‘에이, 얼마나 맛있는데’ 하고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탤런트 최진실씨가 궁핍의 시절에 먹었던 칼국수와 수제비는 커서 절대 안 먹었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뭐, 누가 해주면 맛있게 먹을 텐데…”라고 한다. 옥수수도 그렇다. ‘당원’이라 부르는 사카린을 넣고 삶거나, 그렇게 삶은 걸로 범벅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슬쩍 삶은 걸 연탄 부뚜막에 올려놓고 구우면 얼마나 맛있었는가. 시중에 옥수.. 더보기
을지로 노가리골목 전국엔 무슨 무슨 골목이라고 하여 명물집들이 있다. 서울에도 신당동과 신림동 순대골목, 장충동 족발골목, 저동 골뱅이골목 등이 유명하다. 한여름이 되면 각별해지는 골목이 있는데 을지로 노가리골목이다. 수표교 근처, 을지로3가역 4번 출구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밤이면 ‘야장’의 멋이 넘친다. 야장이란 밤에 간이 테이블을 꺼내놓고 장사하는 임시 영업을 의미한다. 내 외국인 친구가 한번은 이 골목을 보고, ‘골목 유토피아’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휘황한 전등 불빛에 플라스틱 테이블을 깔고 수백명의 손님들이 500㏄ 생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그렇게 부를 만했다. 어느 골목이든 터줏대감과 원조가 있다. 이 골목에서 가장 작고 낡은 집, 바로 을지오비베어다. 올해 아흔인 강효근 선생이 1980년 11월에 문을 열었으니.. 더보기
수궁전골 요즘 서울 서부지역 상권은 속칭 홍대앞이 쥐고 있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홍대앞은 홍대생이 가는 몇몇 대폿집과 두어 개의 카페가 있었을 뿐, 이른바 ‘작업실’이라고 불리는 홍대 미대생의 화실이 들어차 있었다. 그만큼 조용한 동네였다. 신촌과 이대앞이 북적거렸다. 나는 주로 이대앞에서 술을 마셨다. 최근에는 옷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골목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전에는 숨겨진 대폿집이 꽤 있었다. 가장 자주 갔던 곳이 ‘와글와글’이라는 상호의 허름한 해물탕집이었다. 이것저것 잡탕 해물을 넣고 끓여내는 찌개에 ‘두꺼비’나 막걸리를 마셨다. 삼겹살이나 돼지갈비는 언감생심이었다. 해물잡탕이 인기 있었던 건, 그 양 때문이었다. 그저 ‘아줌마, 육수 추가요’라고 외쳐서 양을 원상복귀(?)시킬 수 있었다. 배고픈 청춘.. 더보기
오이의 맛 껍질 대충 벗긴 오이만을 고추장 찍어 밥 반찬으로 하던 때가 있었다. 마른 멸치랑 날오이, 식은 보리밥은 여름 오찬의 한 전형이 아닐까. 여름에 오이만 한 반찬이 없다고들 했다. 오이선이라고 해서 익힘 요리도 있는 모양인데, 여염의 요리는 대개 날것이었다. 오이는 정말 쌌다. 그저 시장에서 ‘한 무더기’로 팔았다. 가물면 쓰고 장마지면 싱겁다고 했지만, 늘 나는 오이가 좋았다. 호박은 질색하고 가지는 정색했지만 오이는 아삭아삭 간식으로도 먹었다. 포장마차에 가면 기본 안주였고, 등산 갈 때 물 대신 챙겨 갔다. 산 정상에서 오이 한 입 베어무는 맛이란! 청계산 정상 부근에는 오이 파는 행상이 있었는데 요즘도 나오시는지 모르겠다. 그 산 초입에는 농사지은 오이를 놓고 파는 농부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더보기
스마트 냉면광시대 마치 빗장이나 봉인이 풀린 느낌이다. 냉면집에 대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냉면집은 이른바 전통의 명가들이 대세였다. 새로운 냉면집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물론 평양식이라고 하는 물냉면을 말한다. 양념을 얹어 먹는 함흥냉면은 흔하게 생겨나고, 막국수집도 새로 많이 문을 여는데 유독 평양식 냉면은 시장 진입이 어려웠다. 시중에 이름을 얻은 냉면집은 백년을 바라보는 우래옥은 물론이고, 적어도 1970~1980년대에 대개 문을 열었다. 물냉면은 단순해서 어렵다고들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안 먹힌다는 뜻이다. 보수적이다. 늘 먹던 냉면이 사반세기 동안 돌고 돌았다. 원래 갈비를 전문으로 하던 벽제갈비에서 우래옥 출신의 주방장을 새로 들여 내놓은 냉면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파격이었다. 맛이 달라졌다기보다 이른바.. 더보기
만두 절대 믿지 않겠지만, 삼십 몇 년 전에 소개팅하던 내 친구들이 선택한 메뉴 중에는 물만두도 있었다. 흐늘흐늘한 날개를 가진, 뜨뜻미지근한 물에 담겨 나와서 젓가락으로 집노라면 미끄덩하고 도로 빠뜨리기 일쑤이던 물만두. 그걸 소개팅 메뉴로 먹었다는 건 이해가 안되지만, 사실이다. 분식집이 소개팅 장소로 이용되던 때였다. 변두리 분식집에서도 거의 갖추고 있던 메뉴인지라 누구나 물만두를 먹었다. 그때 분식집은 나름 격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알루미늄 찜기에 천을 깔고 그 위에 아홉 개씩 올라 있던 통만두, 문자 그대로 철판에 지져서 구운 군만두에 고기만두와 찐빵도 있었다. 통만두와 찐만두는 원래는 다른 만두였는지 모르겠지만 분식집에서 시키면 같은 것이었다. 찜기째 서빙하면 통만두였다. 반죽을 발효시켜서 둥글.. 더보기
여수의 41번집 포장마차는 원래 불법이다. 하나 시민이 사랑하는 명물이 되다보니 없앨 수도 없었다. 그래서 기존 상호를 지우고 번호를 매겼다. 숫자는 운치가 없으나 관리가 쉽다. 기존에 번호를 받은 포장마차는 영업을 하되, 새로 진입하는 것은 막겠다는 시의 묘책이었다. 그것이 명소가 되었다. 소설가 한창훈 선생도 자신의 글에서 연등천의 풍물로 소개하고 있다. 부드러운 여수의 안주 맛, 별미인 병어를 특유의 문체로 묘사했다. 는 수필집이다. 기왕 소설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강의 도 빼놓을 수 없겠다.그곳 연등천의 포장마차는 많이 쇠락했다. 요즘은 맞은편 교동시장 안쪽의 천변을 끼고 신흥 포장마차가 많이 늘었다. 여수는 희한하게도 포장마차의 도시다. 봉산동에 가도 이 지역에서 유명한 ‘남면집’을 비롯한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다.. 더보기
진짜 원조 요즘 오래된 식당이 유행이다. 그 때문인지 생긴 지 몇 년밖에 안된 프랜차이즈 식당이 수십 년 역사라고 광고하고 있다. 영어로 ‘since 19xx년’ 하는 식으로 역사를 홍보하는 곳도 늘었다. 오래되었다는 것은 대중에게 검증받았다는 뜻이다. 이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았으니, 갸륵한 일이고도 남는다. 그것도 모자라 ‘원조(元祖)’ 논쟁도 벌어진다. 오래된 식당에서 일하던 사람이 독립해 근처에 개업하면서 처음부터 ‘원조’라고 붙인다. 또 그 옆에 새로운 집이 생기고 역시 같은 문자를 쓴다. 그러니 진짜 원조집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결국 ‘시조(始祖)’라고 다른 문자를 고른다. 원조나 시조나 같은 뜻인데도 말이다. 그래도 언중이 원조라는 말에 익숙하니, 아예 ‘원조의 원조’라는 낱말로 튀어나왔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