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양평부추축제 사람들은 내게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법을 묻곤 한다. 그곳에서 살아봤으니 특이한 여행법을 추천해달라는 거다. 내 답은 거의 비슷하다. 로마, 피렌체, 밀라노와 베네치아 말고 작은 도시를 가보라고 권한다. 소박한 이탈리아의 삶을 볼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사그라(sagra)에 참여해보라고 한다. 사그라는 작은 축제를 의미하는데, 대개 음식을 주제로 연다. 우리로 치면 면 단위 정도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치른다. 이탈리아도 지방의 노령화, 젊은 인구 부족 현상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런 작은 축제를 열면서 여전히 마을의 과거와 미래를 이으려는 노력을 한다. 개구리(물론 식용이다) 축제나 통돼지구이처럼 흥미로운 주제도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것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양파나 파,.. 더보기
목숨 거는 바다 예전에 취재하느라 오징어잡이 배를 탄 적이 있다. 하룻밤을 먼바다에서 보냈는데 정작 취재는 하지도 못했다. 뱃멀미에 속이 뒤집혀 자그마한 선실에서 끙끙 앓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파도가 밀어닥쳐서 뱃전을 때릴 때마다 배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고, 내 내장까지 울림이 전해졌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당장이라도 출어를 중단하고 귀항해야 할 것 같은데도 작업 선원들은 오징어가 걸려오는 주낙만 바라봤다. 생과 사 같은 건 그들에게 호사스러운 용어였다. 잡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단순한 현실에서 파도 따위야, 이런 태도였달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선은 어지간하면 출어한다. 해경에서 출어금지령이 내리기 전에는 태풍이 온다고 해도 하늘을 본다. 혹시나 나갈 수 있을까 출어를 가늠한다. 선.. 더보기
최저 가격의 존재 이유 언젠가 이 칼럼에서 달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완벽한 한 생명(우리는 이것을 완벽한 영양으로만 표현한다)의 값치고, 우리가 달걀을 너무 싸게 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달걀값은 한 판에 4000원대에도 거래됐다. 한 알에 130.40원짜리였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싼 것은 의심해보라는 건 진리다. 우리는 전자제품이나 다른 상품을 살 때 이런 원칙을 잘 적용한다. 반품이나 진열했던 것은 아닌지, 심지어 핵심기능을 빼고 출시한 저가제품은 아닌지도 꼼꼼히 따진다. 전자제품이나 기타 상품은 ‘먹을 수도 없는 것’인데 그토록 치밀한 분석을 한다. 영화 칼럼에도 심지어 ‘적정 관람료’라는 게 나온다. 영화가 돈값을 하는지 분석해주는 내용이다. 적정 달걀값은 우리에게 없었다. 더 싸게 무한정 공급되.. 더보기
먹을 수는 없어 입시제도의 변천사까지는 아니어도, 대학 입시가 얼추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안다. 본고사에서 예비고사,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이름만 바꿨지 그다지 쓸모 있는 학생 고르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억하건대 가장 웃기는 건 체력장이었다. 고입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20점, 대입 학력고사 340점 중에 20점이 이른바 체력검정 점수였다. 체력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것이 당락에 영향을 준다는 건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그래서 감독 선생님들은 어지간하면 20점 만점을 주기 위해서 ‘적당히’ 채점을 하곤 했다. 문제는 신체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장애 때문에 검정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선심 쓰듯 15점이라는 기본점수를 주는 게 고작이었다. 참말 어른들이 저지르는 개 같은 경우의 제일 윗길에 오를 처사였다. 얼.. 더보기
한국인 밥상 떠받치는 외국인 노동자 20여년 전 유럽에서 겪은 일이다. 가을에 포도 수확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모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타국에서 왔다. 포도는 제때 수확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일이라 일시적으로 손이 많이 필요하다. 자국의 손이 부족하니, ‘차떼기’로 외국 노동자들을 실어날랐다. 이미 노쇠해가고 있던 서부 유럽 노동시장의 한 단면이었다. 지금 한국도 다르지 않다. 농축수산업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바닥 일을 맡고 있다. 최근의 에피소드 한 대목. 봄에 남도의 어느 항구에는 멸치잡이 배가 들어온다. 엄청난 숫자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인다. 아마추어 사진가들까지 몰려 북새통이다. 멸치를 잡아오면 배를 붙이고 그물에서 털어내는 장면이 인기가 높다. 현장 촬영은 늘 애를 먹지만 더 큰 어려움이 있다. 그물 터는 어부들.. 더보기
우리에게 냉면이란 아마 요즘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냉면에 대해 따따부따한다고 해서 ‘면스플레인(면+explain)’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신조어도 유행한다. 평양(식)냉면이 진짜 냉면이라는 경도된 생각이 이른바 미식가나 ‘좀 먹어주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퍼질 정도다. 평양냉면이 냉면의 시대를 연 것은 맞다. 동시에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민족은 제각기 냉면을 먹고 있다. 다른 조리법과 다른 맛을 가진 상태로 말이다. 저 멀리 일본 북쪽, 모리오카라는 지방도시에서도 그렇다. 인구가 13만명이라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자그마치 450여군데의 식당에서 냉면을 판다. 한국식(조선식) 또는 평양식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그중에서 우리 동포가 문을 열어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집만도 여럿이다. 삼천리, 명월관, 식.. 더보기
그 옛날 아이스박스의 추억 옛날 신문을 보면 흥미로운 광고가 많다. 계절에 따라 주력 물건도 바뀌었다. 1960년대는 전후의 혼란을 딛고 안락한 가정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되던 시기였다. 겨울에 난로 선전(예전에는 상업적인 광고물도 주로 선전이라고 불렀다), 여름에는 아이스박스였다. 냉장고는 1965년도에 금성사에서 눈표라는 이름으로 첫 제품을 출시했는데, 한동안 아이스박스와 같이 팔렸다. 냉장고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아이스박스는 1980년대까지도 가난한 집 부엌과 포장마차의 냉장고 노릇을 했다. 동네마다 얼음장수가 까만색 짐자전거에 얼음을 잔뜩 싣고 배달하던 장면도 생각난다. 재미있는 건 그들이 겨울에는 석유, 여름엔 얼음을 팔았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런 ‘양수겸장’업은 일본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우리에게 근.. 더보기
야장을 깔다 이십여년 전 회사 다닐 때 여름이 오기를 늘 기다렸다. 딱 이맘때다. 해지면 호프집 앞에 깔리는 임시 탁자에서 마시는 한 잔의 생맥주 때문이었다. 7월이 무르익으면 해가 져도 무덥다. 그래서 딱 이즈음이다. 날씨는 선선하지도 덥지도 않지, 목은 마르지, 생맥주 마시기에 그만큼 좋은 조건도 없다. 안주야 북어나 치킨 몇 조각이면 그만이었다. 시내 곳곳, 아니 전국이 요즘 야외 생맥주 대목이다. ‘야장’이라고도 부른다. 업계에서는 전문(?) 용어로 ‘야장 깐다’고 한다. 밤에 탁자 깔고 장을 벌인다는 뜻이겠다. 생맥주 가게는 요즘이 대목이다. 한 해 벌이의 상당 부분을 이때 벌어들인다고도 한다. 문제는 불법 논란이다. 도로는 시나 나라 것이니 무단점유가 되고, 식품위생법에도 저촉된다. 영업허가 조건을 위반하.. 더보기
노포 ‘since 1900년.’ 요새 식당가 간판의 한 풍경이다. 오래된 식당이 좋다는 믿음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보통 노포(老鋪)라는 한자어를 많이 쓴다. 노(老)자는 안정감을 주고 신뢰를 드러낸다. 중국어와 한자어에서도 이 글자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존경의 의미를 담는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 자체가 믿음이 된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에서 100년 넘은 식당은 한 개 정도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으니까 말이다. 해방 전에 생겨서 지금껏 운영하는 집도 대여섯 개나 될까 모르겠다. 1970년대에 식당이 많이 생겼지만, 지금껏 하고 있는 집이 드물다. 그래서 1970년대생 식당들은 나이로는 장년에 불과하지만 모두 노포 축에 든다. 왜 그럴까.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추측한다. 첫째, 힘든 일을 자식 대에 넘.. 더보기
김밥과 5·18 어제는 5·18이었다. 이걸 그냥 날짜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대통령까지 행사에 참석해서 젖은 눈으로 노래를 불렀다. 지난 두 정권에서 이른바 합창이냐 제창이냐며 말도 안되는 논란이 벌어졌던 그 노래 말이다. 노래는 정서적이며 정치적이며 선언적이다. 그래서 두 정권의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건 당연하다. 5·18의 핵심 당사자 전두환과 두 대통령은 사실상 한몸이기 때문일 테다. 민족미술 진영에서는 이 피어린 항쟁과 관련해서 많은 예술품을 남겼다. 이른바 최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직접 피해자 홍성담 화백이 주도했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도 그중 하나다. 이 거대한 그림 중에 ‘광주항쟁’이라는 부분이 있다. 계엄군과 맞서 싸우는 청년들 뒤로 ‘아짐’들이 불을 .. 더보기
요구르트 한 병 -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987년 대선 즈음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이 나왔다. 군 부재자투표를 했다. 나는 앞길이 캄캄한 일병이었다. 부대에서는 선거 한 달 전부터 연일 정신교육을 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막사에 중대 병력을 때려 넣고 중대장이며 장교들이 훈시를 했다. 겁도 주고 달래기도 했다. “나 죽는 거 보려면 맘대로 찍어!” 읍소에 가까운 협박도 했다. 그들도 불쌍했다. 노태우 안 찍을 사람 손 들라고 했다. 중대원 중에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김영삼 찍을 깁니다.” 부산 출신 상병이었다. 그는 그대로 ‘격리’되었다. 간부들이 돌아가며 회유하며 얼렀다. 너 때문에 다른 애들 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 사단장님 특별 관심사항인 거 몰라? 그도 결국 굴복했다. 투표날이 .. 더보기
고객 갑질 이제 그만 노동자들이 힘든 건 육체보다 감정이 상할 때다. 특히 주로 감정을 ‘팔아서’ 일하는 이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식당 업주도 감정노동을 한다. 늘 웃어야 하고, ‘고객님’의 요청을 최대한 받들어 모셔야 한다. 이 무한경쟁의 식당 세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물건과 서비스를 팔고 돈을 받는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적당한 ‘교환’인지 헷갈린다. 고객님이 ‘갑질’을 심하게 해도 당하고 산다. 입길에 오르기 두려워서다. 한 후배는 강남에서 양식당을 한다. 처음 온 손님이 “나를 몰라보느냐”며 집기를 던지고 옮겨 적을 수도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지금도 부들부들 떨린다고 한다.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증세도 생겼다. 손님의 폭언은 이 동네에서 그다지 듣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식당 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