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세상

전쟁과 부산역 한국전쟁은 많은 흔적을 남겼다. 지금도 우리는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보듬으며 살고 있다. 전쟁 속에서 불렀던 노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500만명 가까운 피란민들이 북적대던 부산을 배경으로 한 노래가 압도적이다. 부산항과 부산역, 남포동과 광복동 거리가 등장하는 노래가 어디 한두 곡인가. 특히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교차했던 부산역을 무대로 한 노래는 지금 들어도 숨이 멎는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1954년 여름 남인수가 발표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박시춘 작곡, 호동아 작사로 되어 있다... 더보기
‘헤어질 결심’, 그리고 ‘안개’ 29일 제75회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영화 의 박찬욱 감독은 정훈희와 송창식이 함께 부른 ‘안개’를 영화의 엔딩곡으로 썼다. 박 감독은 “두 분과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던 순간은 저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의 평생 꿈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정훈희의 데뷔작 ‘안개’는 영화와 인연이 깊다. 1967년 김승옥의 소설 을 영화화한 김수용 감독의 주제곡이었다. 작곡가 이봉조가 18세 여고생 정훈희를 발탁하여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음악 가족의 외동딸이었던 정훈희는 외.. 더보기
사계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 구름 솜 구름 탐스러운 애기 구름/ 짧은 셔츠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최근 도심을 지나다가 한 대기업 노조의 농성장과 맞닥뜨렸다. “남들 다 가는 여름휴가 가고 싶다”라는 플래카드 구호가 충격적이었다. 봄바람이 불고 꽃들이 둘러 핀 그날, 여름휴가를 가고 싶다는 노동자들이 아직 거기 있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는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 하던 시대에 만들어졌다. 1977년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했던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 문승현은 이듬해 정치학과로 재입학해서 노래패 메아리의 일원이 됐.. 더보기
고백하기 좋은 계절 5월은 고백하기 좋은 계절이다. 햇살은 잔물결 위로 윤슬을 만들고, 저녁이면 산들바람이 귓불을 타고 넘나든다. 고백의 순간에 어울릴 만한 노래가 있다. 조 코커가 부른 ‘유 아 소 뷰티풀’이다. ‘내게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당신은 모르시나요?/ 당신은 내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에요.’ 사실상 ‘당신은 너무 아름답다’라는 고백이 전부인 노래다. 원래는 미국의 뮤지션 빌리 프레스턴과 작곡가 브루스 피셔가 함께 1974년 만들었다. 프레스턴은 연극배우였던 어머니의 무대를 보고 이 노래를 썼다. 같은 해 영국의 가수 조 코커가 원곡보다 느린 템포로 불러 발표한 이후 전 세계를 휩쓰는 고백송이 됐다. 이후 달콤한 보이스와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 가수들이 앞다퉈 리메이크했다. ‘수많은 밤을 창가에 앉아 있었죠.. 더보기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지난해 말 한국의 첫 경양식집이었던 ‘서울역 그릴’이 문을 닫아 아쉬움을 남겼다. 경양식(輕洋食)을 다른 말로 하면 ‘가벼운 서양요리’쯤 될까. 돈가스, 함박 스테이크,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등을 팔았으나 가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경양식집 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리처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그것이다. 고급 경양식집에는 으레 피아노가 있었고, 아르바이트하는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저 1980년대, 이 곡은 언제나 리퀘스트 0순위였다. 피아노가 없다면 LP로라도 자주 플레이를 해야 했다. 양식 먹는 에티켓을 책으로 배워서 모처럼 경양식집을 찾은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주곡이 발표된 건 1977년이었다. 프랑스의 작곡가 폴 드 세느비유와 프로듀서 올리비에 투.. 더보기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버드나무 솜털이 날리는 오월엔 희자매의 노래 ‘실버들’이 제격이다. 오월의 햇살과 바람을 닮아서 부드러우면서도 처연하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 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이내 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탁월한 쇼비즈니스 우먼이었던 한백희와 인순이가 손잡고 만든 3인조 걸그룹 희자매(김인순, 김재희, 이영숙)의 히트곡이다. 한백희는 동두천에서 ‘혼혈’인 인순이를 스카우트한 뒤 노래보다는 쇼에 적합한 걸그룹을 출범시켰다. 김완선의 이모이자 매니저로도 잘 알려진 한백희는 당시 대중음악계를 주름잡던 안타프러덕션의 안치행에게 ‘실버들’을 주문 생산한다. 영사운드의 기타리스트 출신인 안치행은 김소월의 시로.. 더보기
4월이면 그녀가 오겠지 누구에게나 사이먼 앤 가펑클은 추억이다. 1971년 해체됐지만 여전히 팝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그들은 현재진행형이다. 대표곡들도 많지만 4월이면 ‘에이프릴 컴 쉬 윌(April come she will)’을 듣지 않을 수 없다. 폴 사이먼이 만든 노래로 영국에서 잠시 만났던 여인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에 수록됐으며 영화 (1967)의 OST로도 쓰였다. 이들 듀오가 한국에서 유명해진 건 이 영화 덕분이었다. “4월이 오면 그녀가 올 것이다/ 봄비로 시냇물이 넘쳐흐를 때/ 5월이면 내 품에서/ 편히 쉴 것이다/ 6월이면 벌써 변심하여/ 밤거리를 배회하리라/ 7월이면 훌쩍 떠나갈 것이다….” 4월을 제목으로 한 노래치고는 다소 어둡다. 만남과 이별의 정서를 경쾌함.. 더보기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탤런트 김영옥이 서툴지만, 진정성 있는 창법으로 불러 화제가 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는 듣는 이들을 눈물짓게 하는 노래다. 2003년 일본의 작곡가인 아라이 만이 ‘천의 바람이 되어(千の風になって)’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여 아키가와 마사후미, 모리 마키 등의 가수들이 불렀다. 아라이 만은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친구를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에 2009년 2월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한국어로 번안하여 발표했다. 그즈음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여 장례식장 등에서 추모곡으로 쓰였다. 이 노랫말은 1932년 미국 볼티.. 더보기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 전쟁은 참혹하다. 그 속에 인간의 광기와 투쟁, 생존을 위한 드라마가 공존한다. 우크라이나가 참혹한 전쟁터가 된 지금 문득 떠오르는 선율이 있다. 영화 의 주제가가 그것이다. 이탈리아계 미국 작곡가 헨리 맨시니의 작품으로 피아노와 현악기가 어우러져 서정성이 돋보인다. ‘문 리버’ ‘아기코끼리 걸음마’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영화음악을 만든 그는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에 이 음악을 배치했다. 끝없이 펼쳐진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 밭에 서 있는 여주인공 소피아 로렌(조반나 역)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비추면서 주제가가 흐른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평생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독·소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된 남편을 찾아 우크라이나로 온 소피아 로렌에게 현지 주민이 말한다. “해바라기 들판에 이탈리아와 독일.. 더보기
이런 봄날엔 공무도하 공경도하 타하이사 당내공하(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고교 교과서에 실렸던 ‘공무도하가’는 아련한 봄날이면 생각난다. 물에 빠져 죽은 임을 향한 탄식을 담은 고조선의 시가이다. 올드팬들은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강한 인상을 남긴 가수 이상은을 기억할 것이다. 큰 키에 겅중거리는 춤으로 선풍적인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이상은은 자신이 댄스풍의 노래로 각인된 것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어느날 훌쩍 미국 유학을 떠나 미술학도가 된 이상은은 묵직한 음악을 구사하는 싱어송라이터로 돌아왔다. 강렬한 록사운드를 담은 3집 , 4집 과 5집 에서는 뉴잭스윙 사운드와 포크 사운드를 구사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이상은은 그곳에서 동양적 감성으로 무장한 음악을 만들었다. 그런 실.. 더보기
울지 마, 우크라이나 최근 우크라이나의 한 소녀가 우크라이나 키이우(키예프) 소재 방공호에서 부른 영화 의 주제곡 ‘렛잇고’가 전 세계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2016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도 세계인을 감동시킨 우크라이나 여가수가 있었다. 성악가 출신 재즈가수 자말라(사진)가 그 주인공이었다. ‘낯선 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고/ 그들은 모두를 죽였다/ 그들은 정당하다고, 죄가 없다고 말했다/ 휴머니즘은 통곡한다….’ 그녀는 크름반도(크림반도) 소수민족 출신인 자말라의 증조모가 옛 소련 스탈린 정권 시절에 당한 수난을 다룬 자작곡 ‘1944’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자말라는 시청자 투표에서 우세를 점하며 러시아 대표로 나온 배우 겸 가수인 세르게이 라자레프를 3위로 밀어내고 우승했다. 그 당시 외신들은.. 더보기
벌써 30년, 서태지 30년 전 봄, ‘Yo, Taiji’라는 제목의 CD를 처음 봤을 때 그룹 엑스의 멤버 타이지를 떠올렸다. 그를 오마주한 록앨범인가?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군.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렇게 호기심과 논란 사이에서 탄생했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 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MBC 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로 무대를 펼쳤다. 작곡가 하광훈, 작사가 양인자, 연예기자 출신 MC 이상벽, 가수 전영록 등 네 명의 심사위원들이 이들의 무대를 평했다. 심사위원들은 10점 만점에 7.8점을 줬고, 모국어로 된 랩이 혼란스럽지만 강한 개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4년 뒤인 1996년 1월31일 성균관 유림회관에서 ‘서태지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