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세상

이런 봄날에 노란 교복을 입고 줄지어 가는 유치원생들과 마주치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진다. 비록 마스크를 써서 천진난만한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빛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배경음악처럼 흥얼거리게 되는 동요가 있다.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떼 뿅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봄’이라는 동요다. 오수경이 작사하고 박지훈이 작곡한 이 노래는 대략 해방 이후에 만들어졌다. 작곡가인 박지훈 목사는 한양대 음대 교수를 지냈으며, 목사 안수를 받고 캐나다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지난해 9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해방 직후 평안남도 강서군 문동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박지훈은 일본 군가만 부르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50여 곡.. 더보기
대통령의 애창곡 내일모레면 새로운 대통령이 결정된다. 그 무게감 때문이겠지만 대통령은 사소한 일상조차 늘 화제다. 역대 대통령들의 애창곡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만 봐도 대략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를 즐겨 불렀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못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고려의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를 보고 만들었으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간접적으로 노래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가는 객이 누구냐”로 시작되는 ‘방랑시인 김삿갓’이 애창곡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멕시코 노래 ‘베사메무초’를 즐겨 불렀다. 김대중 대통.. 더보기
패닉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 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1995년 1월 등장한 듀오 그룹 패닉(Panic)은 반역 그 자체였다. ‘왼손잡이’와 ‘달팽이’를 담은 데뷔앨범은 무게감이 남달랐다. 리더인 이적이 작사·작곡·편곡을 담당했고, 들국화 출신 최성원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왼손잡이가 어때서? 내 개성이니 상관하지 마’라고 말하는가 하면, 달팽이를 보고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라고 노래했다. 달팽이 머리를 하고 피아노를 치는 이적의 옆에 색소폰을 부는 김진표가 있었다. 대중은 그들의 외모가 아닌 메시지에 열광했다. 그들의 뒤에 ‘매일 그대와’나 ‘제주도 푸른 밤’을 만든.. 더보기
DJ DOC 그리고 김대중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유세가 시작되면서 심심치 않게 선거 로고송이 흘러나온다. 역대 대통령선거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로고송은 ‘DOC와 함께 춤을’이 아니었을까? 1997년 대선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 진영이 DJ DOC의 히트곡을 패러디했다. ‘김대중과 함께라면 든든해요/ 경제 통일 책임질 수 있어요/ 준비되어 있는 대통령/ DJ로 만들어봐요.’ 김대중 후보가 직접 관광버스 춤을 추며 등장한 TV 광고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그 이전 선거까지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식의 구호가 지배했다면, ‘DJ와 함께 춤을’은 단숨에 선거홍보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DJ DOC의 4집에 수록된 이 노래를 만든 이하늘은 “세대 간에 편 가르지 말고, 고정관념을 버리자는 취지로 만든 곡”이라고 밝혔다. 발표하자마자 남녀.. 더보기
청춘 군대 우리나라 청년들은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한다. 군에 가서는 군가를 부르지만 입영 전야에 부르는 노래의 계보는 따로 있다. 전쟁 세대가 만들고 부른 ‘전선야곡’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 속에서는 대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한 시절, 고된 훈련 뒤 조교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떼창하도록 시켰다.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훈련병들은 다 같이 대성통곡했다. 그 경험이 있는 남자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아닐 수 없다.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거쳐 1978년 최백호의 ‘입영 전야’로 넘어오면 우정이 소재가 된다.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엔 너의 웃음이/ 정든 우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그러나 이.. 더보기
바람 그리고 조용필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1997년 봄 어느 날 ‘가왕’ 조용필이 기자를 찾았다. 퇴근길에 서울 방배동 그의 집으로 달려가니 새 노래 몇 곡을 들려줬다. 16집의 타이틀곡을 꼽아보라는 주문이었다.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적극적으로 추천한 노래가 ‘바람의 노래’였다. 특히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에 꽂혀서 함께 소주 몇 병을 비웠다. 조용필 역시 내심 ‘바람의 노래’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필은 바람의 가수다. 그의 목소리는 빈 들판을 떠도는 삭풍이고, 대숲을 흔드는 미풍이며, 갈대숲에서 불어오는 소슬바람이다. ‘간밤에 불던 바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따스한 꽃바람도/ 어디.. 더보기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청춘은 화살처럼 흘러간다. 머리가 희끗해지면 어느새 황혼이다. 그런 회한을 담은 노래가 많지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처럼 오래도록 사랑 받는 곡도 드물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 아들 대학 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지극히 한국적인 이 노래는 엉뚱하게도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블루스 뮤지션인 김목경(사진)은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음악공부를 위해 런던에 있었다. 머물던 2층 방 창문 너머로 노부부가 사는 집이 보였다. 노부부는 주말 저녁 아들 내외와 손주가 돌아갈 때면 오래도록 뜨락에 나와 배웅을 .. 더보기
송창식 밤눈 사륵사륵 눈이 쌓이는 겨울 저녁, 송창식의 노래는 최고의 배경음악이다. 비가 오고, 바람 불고, 꽃이 피고, 새가 울 때도 송창식은 유효하지만 ‘밤눈’의 매력을 뛰어넘지 못한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도 없이/ 가만히 눈 감고 귀 기울이면/ 까마득히 먼 데서 눈 맞는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눈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못 듣는가. 저 흐느낌 소리/ 흰 벌판 언덕에 내 우는 소리.’ 1974년 발표된 송창식의 3집 앨범 수록곡으로 소설가 최인호(앨범에는 동생 최영호로 표기)가 작사했다. 송창식은 6개월 보충역으로 군에 가기 직전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 입대를 앞두고 불투명한 청춘의 한가운데서 겪는 심란함을 통기타 선율에 담았다. 최인호는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이 노랫말을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 밤 썼다고 술.. 더보기
기다리는 마음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태어난 지 50년이 가까워 오지만 새해가 되면 한 번씩 떠오르는 노래다. 김민부 작사, 장일남 작곡의 노래는 제주 방언으로 쓰여진 시가(詩歌)가 바탕이 됐다. 제주도에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두고 목포에 온 남자가 월출봉에 올라 여자를 그리워하고, 여자는 성산 일출봉에 올라가서 남자를 그리워하다가 망부석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담은 가곡 ‘비목’의 작곡가 장일남은 문화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던 김민부와 힘을 합쳐 이 노래로 만들었다. 당시 장일남은 김민부가 건네준 가사를 읽고 단숨에 ‘기다리는 마음’을 완성했다고 한다. 부산 출신의 김민부는 고등학교 시절.. 더보기
벌써 일년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그 생각만으로 벌써 1년이/ 너와 만든 기념일마다 슬픔은 나를 찾아와/ 처음 사랑 고백하며 설렌 수줍음과/ 우리 처음 만난 날 지나가고/ 너의 생일엔 눈물의 케이크/ 촛불 켜고서 축하해… 벌써 1년이 지났지만 / 1년 뒤에도 그 1년 뒤에도 널 기다려.’ 나얼과 윤건이 결성한 R&B그룹 브라운아이즈는 새 천 년이 시작되면서 혜성처럼 나타난 그룹이었다. 원래 나얼은 1999년 앤썸으로 데뷔했고, 윤건 역시 같은 해 힙합 그룹 TEAM으로 데뷔했다. 소속 팀들이 부진해지자 윤건이 나얼을 찾아가서 같이 음악을 하자고 제안했다. 윤건이 리더이자 서브 보컬과 작곡 및 프로듀싱을, 나얼이 메인 보컬과 일부 곡 작업에 참여했다. 두 사람은 윤건의 아파트에서 작업을 시작하여, ‘벌.. 더보기
크리스마스 캐럴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마스크를 벗지 못한 채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다. 시끌벅적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캐럴이다.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부른 머라이어 캐리가 ‘캐럴 연금’을 받는다면 아리아나 그란데에게는 ‘산타 텔 미’가 바로 그런 곡이다. 2014년에 발표한 오리지널 캐럴로 상큼하면서도 발랄한 아리아나 그란데의 목소리가 돋보인다. 진실한 사랑을 찾게 해달라고 산타에게 소원을 비는 한 소녀의 간절한 마음이 담겼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목소리는 캐럴에 너무 잘 어울린다. 그녀가 리메이크한 왬의 명곡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발랄한 목소리와 폭발적인 고음이 인상적이다. ‘스노 인 캘리.. 더보기
일몰의 서해 우리에게 서해는 일몰(日沒)의 바다다. 붉은 낙조와 밤의 고요, 끝없는 갯벌의 바다다. 하여, 한 해가 저물 때면 동해보다 서해가 먼저 떠오른다. 정태춘은 서해의 속살을 가장 잘 아는 가수다. ‘서해 먼 바다 위론 노을이 비단결처럼 고운데/ 나 떠나가는 배의 물결은 멀리멀리 퍼져간다/ 꿈을 꾸는 저녁 바다에 갈매기 날아가고/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물결 따라 멀어져 간다. -‘서해에서’ 일부 1978년 군에서 제대한 정태춘은 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소개로 서라벌레코드사에서 데뷔앨범 을 내놓는다. ‘촛불’ ‘사랑하고 싶소’ 등이 히트하면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재수를 때려치우고 낭인처럼 전국을 떠돌 때나 인천 부근 해안가에서 군 복무할 때 쓴 곡이었다. 경기 평택의 끝인 갯마을 도두리가 고향인 정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