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용재의 건축과 음식 사이

무시되는 디테일, 미완성의 디자인 그런 식의 버스 동선몰이가 교통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려면 조금 더 신중해야 되겠지만, 일단 눈으로 보는 서울역 버스 정류장의 디자인은 세련된 느낌이다. 때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 경기도민으로서, 서울역 정문을 나섰을 때 한 눈에 들어오는 정류장의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그나마 가지고 있던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바로 이 손 세정제통(dispenser) 때문이다. 이제는 존재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때 정말 온 나라를 광풍처럼 휘몰아치고 지나간 신종플루의 시기에 서울시 또는 나라에서 국민의 건강을 위해 남겨놓은 배려의 흔적인 모양이다. 역 앞에서 굽어보며 그 미미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다가, 길을 건너기 위해 걸어 내려와 저 세정제통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너무 놀.. 더보기
팔자 기구한 피자에게 바치는 추모사 '자장면 피자’를 구상하고 있다.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피자 반죽(우리가 흔히 ‘도우 dough'라고 부르는)을 펼쳐놓고, 그 위에 자장면을 얹는다. 피자치즈를 듬뿍 뿌리고 오븐에 넣어 굽는다. 중국집 자장면을 얹을 것인지, 직접 만들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 중국집에서 시킬 경우 보통 자장이냐, 간자장이냐도 결정해야 한다. 그것까지 결정하려니 어째 자장면도 집에서 그냥 만드는 게 속편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피자의 팔자는 기구하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는데 그 시체가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길거리를 나뒹굴며 사람들에게 발길질을 계속해서 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디에서 파는 무엇인지를 따질 필요도 없이 '피자' 라는 이름이 붙으면 아무리 싸다고 해도 비싸지는 작금의 이 현실은 그렇게 피자라.. 더보기
박찬호 선수의 옛집, 알링턴 스타디움 원래 야구장에 대한 글은 지난 번으로 끝내고 다음 봄을 기약할 계획이었으나, 텍사스 레인저스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기념으로 부랴부랴 한 편을 더 준비한다. 몇 년 전, 루이스 칸의 킴벌 미술관을 보기 위해 달라스/포트 워스 지역으로 여행 갔던 길에 들른 적이 있다. 원래 워싱턴 세네터스였다가 텍사스로 옮겨 자리를 잡은 레인저스의 지난 49년은 한마디로 불운의 역사였다.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동안 가을 야구는 딱 세 번 밖에 하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늘 양키스를 만나 1회전도 채 통과하지 못했다. 그 불운의 역사는 빚을 떠안고 계속된 팀 운영 때문에 올해 절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전설의 '텍사스 특급' 놀란 라이언의 팀 매입으로 이제 그 불운의 역사를 뒤로 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 팀.. 더보기
사람의 자리가 없는 공원  가을은 추수의 계절, 눈 앞에 황금색으로 익어 고개를 숙인 곡식의 물결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것도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매체에 공원에 관한 기사를 쓰느라 추석 연휴 전후로 서울 소재 거의 모든 주요 공원을 돌아다녔다.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특징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했다. 보여주기에 집착한 나머지 이용자여야 할 사람이 피사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공원이 가지고 있는 '테마'는 그 공원 자체의 존재를 위한 것이지, 사용자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운 초록띠 공원'은 아주 작지만 그러한 특징을 함축적으로 품고 있는, 공원 아닌 공원이었다. 이 '공원'에는 사실 아무 것도 없다. 조, 수수 등, 요즘은 잘 안 먹는 잡곡들이 심어져 있다. 구색을 갖추기 위.. 더보기
정치적으로 올바른 새우구이란 무엇인가 새우철인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축제에 가서 새우"구이"를 먹었다는 글이며 사진을 많이 보게 된다. 팬이라고 하기에는 높고, 냄비라고 하기에는 낮은 조리 기구의 바닥에 소금을 깔고, 새우를 고래 없이도 등이 터져라 가득 담는다. 그리고는 뚜껑마저 덮어버린다. 미안하지만 그건 구이라기보다는 찜에 가깝다.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재료의 분포 밀도이다.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재료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집올린다. 이건 단지 새우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고깃집에 가면, 일하는 '이모님'들이 정말 불판을 가득 메울 정도로 고기를 올려놓는다. 손님들이 빨리 먹고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다면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문제는 이모님이 없는 집들이라면 배고픈 손님들이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 더보기
야구장 건축과 샌프란시스코의 AT&T 필드 우리나라와 미국 양쪽 모두에서 야구 포스트 시즌이 한창이다. 우리나라는 삼성 대 SK의 코리안시리즈를 앞두고 있고, 미국은 2회전에 해당하는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가 곧 시작된다. 포스트시즌의 열기가 절정에 달아오르는 마당에 야구장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나는 메이저리그는 물론 마이너 리그의 유망주 리포트까지 열독하는 야구광이다(그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미식축구 또한 즐겨보는 편이다). 때문에 야구장이 있는 도시를 많이 여행했고,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의 홈구장 가운데 절반 정도는 돌아본 것 같다. 리글리 필드(시카고 컵스의 홈구장)나 펜웨이 파크(보스턴 레드삭스)와 같이 역사적인 상징 취급을 받아 헐 수 없게 된 몇몇 구장들을 빼놓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야구장들이 지난 15년 사이에 새로 들어.. 더보기
<한국음식 오디세이>와 우리 음식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 우리나라 음식 문화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재미없다. 일단 우리 음식의 우수성을 전제로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음식을 우수하지 않거나, 한술 더 떠 열등하게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른 음식 문화를 무시하거나, 논리의 비약을 범하는 경우를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우수하다고 하는 음식들은 까놓고 말해 요즘 우리가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아니다.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여러 음식 문화가 한데 뒤섞여 있는 우리 음식 문화의 현주소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한식의 세계화든 양식의 한국화든 균형잡인 의견을 내놓는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런 의견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책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보기
새 교보 본점에 대한 잡다한 생각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은 그의 일기를 통해 두 번째 교보본점(이하 교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책에 따라 공간이 나뉘어져 있던 맨 처음의 교보가 더 좋았다는 것이다. 나도 그 옛날 교보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나마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은 정확하게 비교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결과를 따져 본다면 불만을 느끼는 이유는 비슷했다. 공간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던 타원형의 동선은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왠지 책을 위한 공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아늑함이나 편안함의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책장에 세워서 보관하면, 그 책의 모임은 하나의 벽이 되어 큰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그 책장과 책장 사이의 공간, 복도는 한 사람의 어깨 넓이.. 더보기
<알기 쉬운 건축 건축을 모르는 내 아내와 학생들도 이해하는 건축이야기> 글 장성제, 사진 박성현 시공문화사, \12,000 돌아보면 나는 사실 건축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일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학교에 오래 있었지만 주변에는 온통 비슷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다녔던 회사도 당연히 우리가 ‘설계 사무소’라고 부르는 건축회사였다. 모두 건축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었고 나는 그저 한 마리의 피라미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할 기회를 도통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주 가끔, 늦게 일을 마치고 바에 들르면 누군가 물어볼 때가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나의 대답은 “Architecture,” 그 또는 그녀의 대답은 조건 반사적으로“Awesome!"이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많.. 더보기
정말 배웠는지 믿기 어려운,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매튜 프레데릭 글, 그림 / 국내 번역출판 동녁 어느 캠퍼스 드라마에서, 꽃미남 주인공이 건축과 학생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문에 90년대 초중반에 건축과의 경쟁률이 높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기억하기로 그때 건축과의 경쟁률은 정말 높았다. 1년 후배들의 경쟁률은 5대1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과에서 건축과는 의대 다음으로 높은 점수가 필요한 과였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가서 무엇을 배웠더라? 이 책, 를 펴놓고 대학시절을 복기할라치면 한숨부터 나온다. 저자가 배웠노라고 말하는 101가지 가운데 적어도 절반 정도는, 대학에서 배운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건축과에 발을 디뎠을 때, 윗학년 선배들과 친하거나 사무실 같은 곳에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 더보기
만화라서 의미있는 <스위트 하우스> 타이세이 사이토 글,그림 / 장혜영 번역 / 전 2권 / 서울문화사 건축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여자는 건축사('건축설계사'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직업 명칭이 없다. '건축기사'와 '건축사'가 맞는 명칭이다)인 남편이 갑자기 죽자 사무소를 떠맡아 끌고 나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면허도, 경험도 없다. 고민하는 여자 앞에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나타나 남편의 자리를 맡겠다며 일을 자청한다. 수습기간에는 월급도 많이 받을 필요 없다며, 받은 돈마저 돌려준다. 알고 보니 이 남자에게는 죽은 남편과 얽힌 사연이 있다. , 또는 는 대체 얼마만큼 거창하여야만 하는 걸까? 이 책을 첫 번째로 소개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려 한다. 더 거창하고 무거운 다른 책들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