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

(9) 여행가 유성용 ㆍ사람들이 굳이 올레·둘레길을 택하고 완주에 집착하는 게 희한 ▲ 지금 필요한 건 나를 좀 버려두고 걸을 수 있는 공간…요즘 사람들은 여러 겹의 인생 안전장치 쳐 놓아 다양한 사건 못 만나 정신적인 고통에는 오로지 하나의 해독제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이다. - 카를 마르크스 “제니 필즈는 마흔한 살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으며 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이었다.” 에 나오는 존 어빙의 말을 내게 처음 얘기해준 사람은 소설가 C였다. 마흔이 되면 뭐가 달라지냐는 서른 몇 살 후배의 말에 그는 40대야말로 장편을 쓸 수 있는 최고의 나이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내게 그것은 쓸쓸한 위로의 말이었다. 소설을 잘 쓸 수 있다는 말보다, 마흔 살이 앞으로 쓸.. 더보기
마음속의 삼원색 비 내리는 봄날, 기운찬 새순과 흐드러진 춘색을 누르며 강렬한 삼원색 꽃이 걸어가더라. 모든 색이란 본디 좋고 나쁨, 귀하고 천함의 구분이 없다. 눈에 보이는 색깔은 각각이 다 고유하다. 특정한 색에서 특정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색의 보편적 성질이 아닌 개인적 경험이거나 편견 또는 감성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본디 말이 없는 색에 감정을 실어 수선을 떤다. 진실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명백함을 뜻하는 빨간색은 위선에 동원되면 ‘새빨간 거짓말’이 되어 더 붉어지고, 권위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노란색은 주의·조심에 쓰이는 경고색이 되기도 한다. 파란색은 신성하고 희망적인 뜻과 함께 우울함을 나타낸다. 빨강 노랑 파랑, 그 원색이 비율을 같게 또는 다르게 이루어내는 오만색의 찬란한 행렬은 얼마나 신비한가. 하.. 더보기
표현의 자유 억압하는 ‘가처분 신청’ 다음의 세 가지 사례를 보자. 지난 200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씨가 영화 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다룬 영화다. 법원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가운데 일부만을 받아들여 영화 속에 삽입된 다큐멘터리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하라 판결했다. 영화는 3분30초가량이 암전된 상태로 관객에게 공개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영화가 작품의 소재가 된 개인이나 집단의 반발에 부딪힐 때마다 소송에 부쳐지고, 법률적 판단을 따라야 한다면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달 8일 국방부는 다큐멘터리 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기로 결정했다. 는 북한 어뢰에 의해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합동조사단의.. 더보기
(8) 신부 홍성남 ㆍ틱낫한 욕 많이 했다… 살 집 부서질 땐 평상심 대신 크게 싸워야 ▲ “신부는 거주지가 불분명하고 마피아 조직이나 군대와 비슷…순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해” 명동성당을 가던 길에 오래전 일 하나가 떠올랐다. 붙잡는 사람 없는 그곳에 우연히 들어간 적이 있다. 성당에는 띄엄띄엄 사람들이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평소엔 접할 수 없는 높이 때문이었을까. 성당 천장 위에선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햇볕이 날아다녔고, 한없이 내가 작게 느껴졌다. 기도를 하다가 나는 조금 울먹였던 것 같기도 하다. 머릿속에는 천상의 소리처럼 무엇인가 스쳐 지나갔다. “내 죄를 사하노라!” 태어나서 신부님과 단 한번도 말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은 고해성사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더보기
다시 5·18 1980년 5월18일 전후, 광주에선 어이없고 황망한 일이 벌어졌건만 많은 이들은 알지 못했다.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어제의 일이건만 먹고살기 바쁜 세상은 참으로 무심하다. 잘 먹고 잘 살려는 핑계로 그 일을 모른 체한다면 역사 또한 우리를 기망하리라. 역사공부의 비법은 눈으로 읽은 책을 마음으로 다시 한번 더 읽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날의 기록을 다시 펼친다. 6월항쟁 사진집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에서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참여한 ‘평화로운 시위’ 장면부터 ‘처참하게 학살당한 시민들의 유해’와 시신들을 본다. 사진집 (5·18기념재단, 2006)에서 ‘쓰러진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홧발로.. 더보기
(7) 정신과 의사 서천석 ㆍ치유는 사실상 불가능, 상처의 흔적일 뿐인 흉터에 집착 말아야 ▲ 여성도 아이들도 우울증은 흔한 병…“위로는 상대에게 내 시간을 선물하는 것”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어른 마음까지 보듬다 정신과 전문의 서천석을 만났을 때, 그가 내게 처음 던진 질문은 “아니, 왜 저를 인터뷰하시려고요? 제가 유명인도 아니고!”였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란 책을 읽고 있었다. 동생의 자살로 괴로워하던 한 여자가 ‘왜?’라는 의문을 품고 동생의 삶을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심리부검’이란 말을 만났다. 책의 부제가 ‘어느 자살생존자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자살생존자’란 말도 처음 보았다. ‘처음’이란 말에 이토록 세게 부딪치기도 처음이라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다. 친구가 우울증에 걸려 죽음을 말하기.. 더보기
분노를 도매가로 팝니다 항상 가장 잘 팔리는 건 공포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MSG를 먹으면 건강이 나빠진다. 마릴린 맨슨을 들으면 총기난사범이 된다. 게임을 하면 폭력적이 된다. 학교폭력의 원인은 웹툰이다” 등. 공포 마케터들은 특정 결론에 이르기까지 작용하는 수많은 원인과 맥락을 배제한 채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너의 불행이 초래되었거나, 혹은 곧 초래될 것이라고 겁 주는 방식으로 공포를 판매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분노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이렇게 큰 부조리가 있는데 지금 잠이 옵니까. 당신이 부끄럽지 않은 부모이자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당장 분노하고 주머니를 여세요.” 이와 같은 딜러들의 마케팅 포인트는 실제 사회의 부조리를 규명하기 위해 골몰하고 행동하는 이들과는 달리, 그 .. 더보기
바다 위를 걷고 싶다 ‘빛이 있었다’는 태초에 길은 없었다. 빛과 어둠 사이의 시간과 명멸하는 뭇 생명을 관할하는 조물주도 길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은 오로지 인간만의 영역이다. 어디 인간 아닌 존재가 만든 길을 본 적이 있는가, 들은 적이 있는가. 인간만이 길을 만든다. 인간이 걷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길의 변천사는 곧 인간의 역사다. 길은 인간의 삶과 삶터를 잇고 있게 한다. 작은 집단에서부터 너른 문화권의 교류·왕래·소통을 위해 만드는 길이 거꾸로 삶을 잊게 하는 수도 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길 중에 곧고 너른 길들은 대부분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장벽이 된다. 느린 움직임의 모든 존재를 무시하는 고속도로, 강과 연결된 생태 고리를 끊는 강변도로, 바다와 뭍의 유기적 관계성을 차단하는 해안도로, 지리·지형·지물의.. 더보기
(6) 작가 박상연 ㆍ잘 쓰는게 아니라 잘 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단 걸 알았죠 ▲ 복선 많이 넣으면 잘 쓴 것처럼 보여…난 셰익스피어보다 글 많이 써, 그러니 내 드라마가 예술일 순 없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2세는 ‘형제 살해법’을 칙령으로 공표했다. 아들 중 누구라도 술탄의 왕좌를 물려받으면 즉시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여야 하며, 종교 지도자와 법률학자들이 이 절차를 이미 승인하고 허용했다는 말이다. 드라마 의 이방원은 아들 ‘이도’(세종)에게 권력에는 독이 있어 그것을 밖으로 뿜지 못하면 안으로 썩는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긴다. 피 냄새가 가신 적 없는 아비의 자리를 보고 자란 이도는 자신의 유약함을 저주하며 다른 세상을 꿈꾼다. 그렇게 권력의 독을 안으로 품어 ‘문’(한글).. 더보기
(5) 광고인 박웅현 ㆍ밥 먹을 땐 먹고, 쉴 땐 쉬고… 개처럼 살며 ‘현재를 붙잡아라’ ▲ “가정 포기하려면 광고를 왜 해요”모든 사생활이 모든 복무에 우선한다는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 닮아 누군가 카푸치노의 풍성한 거품을 보고 구름을 떠올렸다면, 맑은 하늘 위의 흰 구름일 것이다. 그런데 기상청에 전화했더니 일주일 안에 맑은 하늘을 보기 힘들다는 통보를 받았다면? 구름을 수렵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한 남자가 카푸치노 잔에 구름을 담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이나영이 나오는 카푸치노 광고 ‘훔치고 싶은 거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제품의 실제 거품이 지중해 도시 한복판의 구름처럼 풍성한지 아닌지는 2차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앤디 워홀이 광고주에게 들은 살벌한 충고도 ‘스테이크가 아니라 스테이크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팔아.. 더보기
공갈빵이 아니라 공간빵이다 빵이나 떡은 만드는 재료가 이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보리빵·옥수수빵은 주재료가 이름이 되고 쑥떡·콩떡·팥빵은 부재료가 이름이 된다. 술빵이나 꿀떡은 특징적인 맛이 이름이 된 경우다. 생긴 꼴로 불리기도 하는데 붕어빵·곰보빵이나 꽈배기과자가 그런 경우다. 부산에 사는 제자가 날 보러 오면서 오래되고 소문난 중국집 빵을 사왔다. 둥근 모양에 속이 텅 비었다. 겉만 보고는 밀가루 구워진 맛을 짐작했는데 속에 발린 설탕 맛이 달고 씹히는 참깨 맛이 고소했다. 빵보다는 과자에 가까운데 이름은 엉뚱하게 공갈빵이더라. 공갈은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 빵에 무슨 거짓이 있을까. 둥근 빵이나 바람 빵 아니면 속 빈 빵으로 부르지 않고 공갈빵이라 하는 것을 보면 속이 꽉 찼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재미가 공갈로 .. 더보기
서로에게 상처주는 ‘정의로운 폭력’ 한국 사회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타자가 정의롭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종종 법상식을 상회하는 언어 폭력이나 명예 훼손, 신상 공개와 같은 일들이 정의롭지 않은 자들에 대한 단죄의 방식으로 집행된다. 정의롭지 않은 자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은 늘 떳떳하다. 가해자들은 되레 무협지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근대의 지사, 혹은 저널리즘의 보루로 스스로를 과장되게 치장한다. 이는 분단국가라는 사실관계로부터 87년 체제의 한계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 안에서 만들어진 태도다. 이러한 경향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이 상반된 정의로움에 대해 이쪽에선 적반하장이라 생각한다. 저쪽에선 이중잣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상대가 악마임을 주장해야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 더보기